초이스안경점 / 심여혜
파스텔 엷게 편 듯 아스팔트 뿌에지다
보고 싶은 형상들이 미간에 들인 주름
손 그늘 닿은 교차로 회색 어닝 따라선 곳
차가운 시간들이 두껍게 걸쳐진 테
훌훌 떠난 계절 앞에 원근법 생생하다
다초점 세상 속으로 빛들이 색을 입는
(시조집 ‘구름파이’, 책만드는집, 2024)
[시의 눈]
바야흐로 생은 가을로 접어들었습니다. 젊었을 적 신던 밤색 구두를 신장 선반에 얹은지 꽤 됐습니다. 나이 드니 운동화가 편하더군요. 팽팽한 구두엔 곧 먼지가 내려앉고 삭게 돼 결국 버려지겠지요. 어느날부터 까맣게 보여야 할 아스팔트가 회색으로 보입니다. 주변의 노인 교통사고를 목격하며, 승용차도 몰지 않아야겠다 맘먹습니다. 얼마 전 면허증을 반납할까하고 경찰서 민원실에 갔다가 복잡하단 핑계로 그냥 왔네요. 요즘 아내는 나더러 책 앞에 잔뜩 미간을 좁힌다는 지적을 하곤 합니다. 그래, 난 아무렇지 않다는 듯 웃어 보이지요. 오늘은 동네 사거리 안경점 어닝 안을 기웃거리다 내 손목을 끌어당깁니다. 그러곤 쌈박질하듯한 칼주름 미간도 가리기 좋다며, 두꺼운 초이스 검은 테의 다초점 안경을 권합니다. 인생의 봄과 여름을 보낸 오후, 단풍 든 나무의 미세한 떨림을 가까이 보려면 그게 좋을 듯합니다. 네일아트를 방금 받고 온 듯한 반짝거리는 은행잎 손톱의 아가씨가 다가옵니다. 그녀가 진열장에서 꺼낸 안경을 받아 끼어 봅니다. 하, 원근법을 학습한 모범 수채화처럼 생생하군요. 세상 속 빛들은 형형색색 몸바꿈을 시작합니다. 눈 가린 회색빛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요. 안경 밖으로 도망한 빛을 더 멀리 쫓아냅니다. 이제 울긋불긋 단풍의 인생을 맞는 가을이니까요. 심여혜 시인은 부산에서 나, 2021년 ‘한국동서문학’으로 등단해 ‘이화시조’ 동인으로 활동합니다. 그는 소외된 존재들의 다양한 서사와 그에 드리워진 상처를 끌어내 따뜻한 정서의 부조를 새기는 시인입니다.
<광주매일신문 노창수·시인>
'글쓰기 공부방' 카테고리의 다른 글
사랑한다 / 정호승 (0) | 2024.09.05 |
---|---|
<토요강좌/시의 인문학 > 가려진 진실을 찾아서 (1) | 2024.09.02 |
말의 고아 / 성윤석 (0) | 2024.09.02 |
하여간, 어디에선가 / 박승민 (0) | 2024.09.02 |
베개 / 김기택 (0) | 2024.09.0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