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쓰기 공부방

나중에 / 이향아

귀촌일기 박뫼사랑 2024. 7. 16. 09:57

나중에 / 이향아

 

어머니는 늘 ‘나중에, 나중에’로 미루었다
먼 훗날 네가 크고 자~알 살게 되면
그 통에도 꼬박꼬박 날짜는 흘렀는데
옛날보다 나는 크고 자~알 살게 되었는가
나중을 기다리던 어머니는 떠나시고
‘나중에, 나중에’를 어디 가서 찾을까
나중은 깊은 절간 요사채에 붙잡혔나
나중이 오는 길은 문턱이 닳고 닳아
철통같은 궁성 안에 보신하고 있는가
오는 길 미끄러워 되돌아가 버렸는가
서슬 푸른 눈으로 말총 갓 눌러쓰고
어디에 비켜서서 나를 보고 있는가
(시집 ‘모감주나무 한 그루 서 있었네’, 시와시학, 2024)

[시의 눈]
엄마와 손잡고 시장길 가던 아이가 멈춰 섰습니다. 작은 손가락이 쇼윈도에 메뚜기발처럼 머물렀습니다. ‘엄마 저 인형…’ 얼굴을 빤히 쳐다봅니다. 한데, 그 눈을 곧 내려놓고 고쳐 말합니다. ‘음, 나중에’ 엄마의 얼굴에 낀 회색 그림자를 보았기 때문입니다. 그후로 아이는 필요한 걸 말할 때 어투를 바꿉니다. ‘나중에…’, ‘나중에?’, ‘참, 나아중에에’, 그러다 나중엔 체념한듯 ‘나중에에에’하고, 엄마를 달려래 ‘에’를 길게도 뺍니다. 그 ‘나중에’를 몇십 번이나 거듭한 후에 막내는 ‘요사채’에 붙잡혔던 제 방을 꺼내올 수 있었지요. 세월이 흘렀습니다. ‘나중’의 그 ‘궁성’도 곧 헐리게 된답니다. ‘나중에’ 재건축되면 ‘네 방도 생겨!’ 막내가 제 딸애에게 말합니다. 그녀는 ‘말총 갓’처럼 올라가는 거푸집을 보며 제 딸애의 방을 어떻게 꾸밀까 하는 40대가 되었지요. 이향아 시인은 충남 서천 출생, 1966년 ‘현대문학’으로 등단했습니다. 이어 시집 ‘눈을 뜨는 연습’ 등 26권, 수필집 ‘쓸쓸함을 위하여’ 등 18권을 냈습니다. 그는 만년의 깊은 사유의 우물에 시의 두레박을 넣어 넘칠 듯 그러나 넘치지 않은 시의 물을 독자 대접에 부어주는 정분 깊은 시인입니다.

 <광주매일신문 노창수·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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