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의 노동 / 유병록
불은
죽은 이의 몸을 태워 한줌의 가루로 만든다
이미 뜨거움을 느끼지 못하겠지만
몸을 움츠리지도 않지만
불은 망설이지 않는다
남겨진 신발을 태우고 여름옷과 겨울 외투를 태우고
몇 계절을 순식간에 태워버린다
표정이 일그러지지만
시간조차 얼마 걸리지 않지만
불은 타오른다
성실한 일꾼처럼 쉬지 않고
남은 자가
불길 가까이 다가갔다가 화들짝 놀라서 물러서다가
나는 살아 있구나 깨닫다가
참을 수 없이 수치스러워지지만
그 순간
남은 자의 가슴으로 옮겨붙는
불에게 휴식이 없다
불은
온전히 타버랄 때까지 꺼지지 않으리니
[유병록 '아무 다짐도 하지 않기로 해요' 창비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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