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쓰기 공부방

불의 노동 / 유병록

귀촌일기 박뫼사랑 2023. 4. 20. 14:55

불의 노동 / 유병록

 

불은

죽은 이의 몸을 태워 한줌의 가루로 만든다

 

이미 뜨거움을 느끼지 못하겠지만

몸을 움츠리지도 않지만

 

불은 망설이지 않는다

남겨진 신발을 태우고 여름옷과 겨울 외투를 태우고

몇 계절을 순식간에 태워버린다

 

표정이 일그러지지만

시간조차 얼마 걸리지 않지만

 

불은 타오른다

성실한 일꾼처럼 쉬지 않고

 

남은 자가

불길 가까이 다가갔다가 화들짝 놀라서 물러서다가

나는 살아 있구나 깨닫다가

 

참을 수 없이 수치스러워지지만

 

그 순간

남은 자의 가슴으로 옮겨붙는

 

불에게 휴식이 없다

 

불은 

온전히 타버랄 때까지 꺼지지 않으리니

  [유병록 '아무 다짐도 하지 않기로 해요' 창비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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