높은 봄 버스 / 심재휘
계단을 들고 오는 삼월이 있어서 몇걸음 올랐을 뿐인데 버스는 간다 차창 밖에서 가로수 잎이 돋는 높이 누군가의 마당을 내려다보는 높이 버스가 땀땀이 설 때마다 창밖으로는 봄의 느른한 봉제선이 만져진다 어느 마당에서는 곧 풀려나갈 것 같은 실밥처럼 목련이 진다 다시없는 치수의 옷 하나가 해지고 있다
신호등 앞에 버스가 선 시간은 짧고 꽃이 지는 마당은 넓고 '연분홍 치마가 봄바람에 휘날리더라' 그다음 가사가 생각나지 않아서 휘날리지도 못하고 목련이 진다 빈 마당에 지는 목숨을 뭐라 부를 만한 말이 내게는 없으니 목련은 말없이 지고 나는 누군가에게 줄수 없도록 높은 봄 버스 하나를 갖게 되었다
[심재휘 '그래요 그러니까 우리 강릉으로 가요' 창비 2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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