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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복의 시 /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귀촌일기 박뫼사랑 2026. 4. 13. 06:01

축복의 시 /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누구도 눈물이나 비난쯤으로 깎아내리지 말기를.
책과 밤을 동시에 주신
신의 경이로운 아이러니, 그 오묘함에 대한
나의 허심탄회한 심경을.

신은 빛을 여읜 눈을
이 책 도시의 주인으로 만들었다.
여명마저 열정으로 굴복시키는 몰상식한 구절구절을
내 눈은 꿈속의 도서관에서 읽을 수 있을 뿐.

낮은 무한한 장서를 헛되이
눈에 선사하네.
알렉산드리아에서 소멸한 필사본들처럼
까다로운 책들을.

(그리스 신화에서) 샘물과 정원 사이에서
어느 왕이 굶주림과 갈증으로 죽어 갔네.
높고도 깊은 눈먼 도서관 구석구석을
나는 정처 없이 헤매네.
(후반부 생략)

-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1899~1986)


작가이자 도서관 사서였던 보르헤스는 1955년 아르헨티나의 국립도서관장이 되었다. 하지만 바로 그 무렵 안타깝게도 시력을 거의 상실했다. 신은 그에게 “책과 밤을 동시에 주신” 것이다. 사랑하는 책들을 가까이 두게 되었지만 정작 본인은 읽을 수 없게 된 상황을 보르헤스는 “신의 경이로운 아이러니”라고 표현한다. 만지는 것마다 황금이 되는 능력을 가졌지만 그로 인해 오히려 물과 음식을 먹을 수 없었던 미다스왕에 자신을 빗대는 것도 그래서다. 이 시의 생략된 후반부에서 보르헤스는 도서관의 어두운 복도를 지팡이에 의지해 걸으며, 자신보다 앞서 비슷한 운명을 겪었던 문인 ‘그루삭’을 떠올린다. 보르헤스는 눈이 먼 덕분에 도서관이라는 거대한 지식의 미로를 눈이 아니라 마음으로 조망하게 되었는지도 모른다. 그가 초기에 시를 쓰다가 30년 만에 다시 시를 쓴 것도 다른 이의 도움을 받아 구술로 글을 써야 하는 사정 때문이었다. 머릿속으로 시상을 정리해야 했기에 그는 4행 단위로 된 정형시를 주로 썼다. 육체의 눈이 닫히면 마음의 눈이 열리고, 소설의 문이 닫히면 시의 문이 열린다는 것. 그런 점에서 보르헤스의 시련은 일종의 축복일 수도 있겠다. 

[경향신문 나희덕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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