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쓰기 공부방

새의 흔적 / 정진규

귀촌일기 박뫼사랑 2025. 9. 1. 05:28

새의 흔적 / 정진규

 

새들은 한 나뭇가지에만 머물지 않는다 이 가지에서 저 가지로 옮겨앉는다 새는 언제나 새이지만 그럴 때마다 나무의 모양이 달라진다 세상이 달라진다 대낮에도 깊게 고여 있는 어둠을 새들의 날카로운 발톱이 조금씩 찢어놓았기 때문이다 나는 졸다가 자꾸 깨었다 그럴 때마다 찢긴 어둠, 별을 보았기 때문이다 빛을 보았기 때문이다
- 정진규 '새1'


존재는 고정적 실체가 아니라 관계 속에서 드러나는 현상이라고 했던가. 한 마리 새의 작은 이동이 곧 세계의 형상을 바꾸어 놓는다는 사실을 시인은 직관한다. 미세한 존재들의 흔적이 쌓여 거목의 생장의 방향마저 달라진다는 것. 그렇다. 세상은 거대한 사건의 총합이 아니라 보잘것없어 보이는 존재들이 남긴 흔적의 연쇄 끝에 비로소 풍경으로 드러난다. 곧 더위가 잦아들고 무한한 하늘이 열릴 것이다. 광활한 푸르름을 스치는 한 마리 새의 비상조차 존재와 세계가 교차하는 징후처럼 다가올 것이다.
[매일경제 신문 김유태 문화스포츠부 기자(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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