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쓰기 공부방

나무 빈 의자 (사계) 1 / 정복여

귀촌일기 박뫼사랑 2024. 10. 15. 11:47

나무 빈 의자 (사계) 1 / 정복여

 

무엇보다도 마음이 가는것은 뒤뜰에 놓인 나무벤치에요

식탁에서 일어나 부엌으로 난 작은 창을 열면

키작은 솔나무 숲 사이로 보이는 나무 빈 의자

저기 기대인 보랏빛 여뀌열매, 발밑에 깔린 풀융담, 

그 위로 꿈처럼 반지꽃이 군데군데 피어 있어요

한낮에 슈퍼를 다녀가던 똘스또이나 스땅달도 잠시 쉬었다 가는

거기 오늘은 내가 앉아보기로 하였어요

푸른 느티나무 양복 속 그늑골 아득한 그곳에

저녁 하늘 꽃물이 천천히 흘러내리고

가을 심장 깊이 나는 흔들흔들 뭉게구름이 되어가지요

저만치 카추샤가 땅 위를 두리번거리며 걸어오네요

아마 한낮에 떨어뜨리고 간 외투 단추를 찾는 듯해요

나는 목에 둘렀던 스카프를 풀어내어 머리에 써봅니다

갑자기 한무리의 새떼들이 발밑으로 날아들어요

깃털을 푸덕이며 낮동안 묻혀온 햇살을 털어내고 있군요

햇살이 잘게 반짝이며 땅속으로 스며드네요

가물가물 멀어지는 한낮을 하나둘 세고 있는데

옆을 지나던 바람이 어깨를 툭 치며 지나갑니다

내 한낮은 저기 내 방에 벌써 데려다 놓았다구요

 [정복여 '먼지는 무슨 힘으로 뭉쳐지나' 창비 2000]

728x90

'글쓰기 공부방' 카테고리의 다른 글

활 / 김주대  (0) 2024.10.16
추포가(秋浦歌) / 이백  (0) 2024.10.15
사랑(1970년대) / 이영광  (0) 2024.10.15
단 한권의 책 / 김경후  (0) 2024.10.14
저녁 잎사귀 / 잠긴다 한강  (0) 2024.10.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