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쓰기 공부방

에스프레소 / 홍성란

귀촌일기 박뫼사랑 2023. 4. 3. 13:08

에스프레소 / 홍성란

 

출렁거리다 말게 그 물동이는 그냥 두고
로멘스는 가만 저어 메이플 시럽을 넣고
허전히 무상(無常)이라는 말에 닦아내는 오늘

누구의 순간도 다 지나가지 않더냐
미안하다는 말은 버리고 너도 잔을 들라
지구엔 모서리가 없으니 물렁거리기로 한다
(시집 ‘매혹’, 현대시학사, 2022)

[시의 눈]
옆 벽엔 히말라야 그림이 있네요. 울화가 올 때, 겨울 풍경은 도움될 듯도 해 이 커피집 단골이 됐습니다. 갓 볶은 원두를 머신에 짜내는 아가씨의 덧손장갑엔 뜨거운 에스프레소 잔이 들려집니다. 고통을 주었다 한들 ‘다 지나가지 않더냐’. 날 괴롭힌 시 ‘너도 잔을 들라’. 참, 시 앞에 깨어진 머리를 수습하는 아침입니다. 특효약은 커피의 참기름이랄까요. 우선 시로 얼룩진 아이패드는 한쪽에 밀쳐두고, 이어폰으로 테일러 스위프트의 ‘Anti Hero’를 듣지요. 간밤, 내 글에 어줍잖은 애무만 퍼붓느라 애를 먹었네요. 시의 칼을 갈려다 숫돌만 이리저리 돌리고 만 격이랄까요. 별수 있겠어요? 시와 빚은 갈등의 모서리를 닳아지게 하고, 그 두 사이가 ‘물렁거리기’ 위해서, 아니 섞이기 위해서, 진한 ‘에스프레소’는 엔진오일이듯 필요합니다. ‘부르응!’ 3번 테이블 대기 벨이 떱니다. 트랙은 비욘세 ‘Cuff It’으로 바뀌는군요. 리듬이 헉, 가팔라집니다. ‘엎지르겠어요, 선생님, 미안해하지 마시고 하루내 천천히 드세요’. 아침 첫손님이란 걸 아가씨 말을 듣고서야 압니다. 이 고질이 어디 가겠어요? 또 내일 반복하겠지요. 홍성란 시인은 부여에서 나, 1989년 중앙시조백일장 장원으로 등단했습니다. 시조집 ‘춤’(2013), ‘애인 있어요’(2013) 등이 있습니다. 그는 양달로 흔들리며 다가오는 그늘을 기다리듯 내면 평화를 빚는 시인입니다.
<광주매일신문  노창수·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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