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쓰기 공부방

운명을 슬슬 쓰다듬어 보는 저녁이야 / 박서영

귀촌일기 박뫼사랑 2023. 3. 22. 06:29

운명을 슬슬 쓰다듬어 보는 저녁이야 / 박서영

 

앵두나무에서 태어난 건 행운이었지

아직 태어나지 않았다고 해야 하나

어쨌든 태명까지 생겼으니

누군가의 표적이 될 수도 있겠다 싶어

앵두꽃 피면 꽃처럼 하얗게 몸을 둘둘 말고

앵두 열매 열리면 초록 알이 되고

앵두 익으면 빨갛게 변신도 해보는 거지

남이야 보든 말든

아랫도리 힘줘 끙끙 씨앗같은 똥도 눈다

사과나무에서 태어난 너

대추나무에서 태어난 너도 그랬겠지

잎사귀로 슬쩍 몸을 가리고

저항의 속도를 늦추며 기다리는 거지

벌레들은 나의 성장을 반가워하진 않을거야

다정하게 속삭여도 뒤퉁수를 조심해야 하지

하지만 벌레들은 나의 과거이자 미래

동족의 피맛보다는 잘익은 앵두나 따 먹을래

그래도 영 찝찝하고 서운한 하루야

아직 태어나지 말아야 하나

내가 앵두나무 속에 있는게 아니라

앵두나무가 내 속에서 부화하는 것 같아

밖으로 뻗어나간 나뭇가지가 점점 뜨거워지고 있어

나는 이렇게 씩씩대다가 깨져버리겠지

어딘가로 노랗게 흘러가 종이 위에 얼룩을 남기는 문장처럼

흘러가는 운명을 슬슬 쓰다듬어 보는 저녁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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