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쓰기 공부방

억 억 / 이서영

귀촌일기 박뫼사랑 2023. 2. 27. 11:24

억 억 / 이서영

 

명동 성당 길을 걸었다
성당 길 그 길

첨탑이 아름다운 그림자를 눕히는 자리
한 뼘씩 키를 높이는 계단
그 밑에 납작 엎드린 억을 깔고 앉아
땡볕 아래 밥을 먹는 한 사내

박카스 박스 속 부서지는 지전
지전을 지그시 밟고 있는 동전 동전들

아 아 아득해지면서
(시집 ‘안녕 안녕 아무 꽃이나 보러 가자’, 파란, 2022)

[시의 눈]
억, 아득합니다. 아니, 까마득합니다. 억 억의 억, 그건 떠올리지 말라는 듯 제 끄댕이를 당깁니다. 멍때리는 하늘로 억은 사라지는군요. 열시반, 큰 그늘에 사내는 억처럼 버티고 있습니다. 가는 눈으로 때묻은 박스를 간혹 기웃거리는군요. 뭐 지전이길 꼬누는 게지요. 좀 전 물방울무늬 양산을 쓴 초록 메니큐어한 분이 낙하해 주던 개폼도 벌써 아련해졌습니다. 박스 안엔 햇빛 한 줌만 억 연기를 하며 찬란히도 누웠습니다. 은색 구찌백 문을 나오시던 세종대왕님도 이젠 ‘어허, 짐도 돌아가고 싶소’ 이리 보채시는군요. 참, 초딩 셋이 지나갔지요, 동전내기로 딴 세 개가 얍, 바람 지전을 누르고 있습니다. 아득해지자 그가 몸을 세우는군요. 억, 그늘로 또 땡겨야 쓰것다. ‘야 깽판!’, 갑자기 의원나리 한 분이 그 그늘이 탐나 꽥 소리 질러요. 이서영 시인은 해남에서 나 2021년 광주일보 신춘문예 ‘잊다 잊어버리자 잊혀지거나’로 등단했습니다. 그는 심층 의식과 내면 사이에 미세 파동으로 교류하는 서정의 발랄함을 시의 이미지로 옮겨오는 젊은 시인입니다.

 <광주매일신문 노창수·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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