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적(靜寂) / 송수권
절문 밖에는 언제나 별들이 싱그러운 포도밭을 이루고 있었다
빗장을 풀어놓은 낡은 절간 문 위에는 밤새도록 걸어온 달이
한 나그네처럼 기웃거리며 포도를 따고 있었다
먹물처럼 떨어진 산봉우리들이 담비떼들 같이 떠들며 모여들고
따다 흘린 포도 몇 알이 쭈루룩
산창(山窓)을 흘러가다 구슬 깨지는 소리를 내고 있었다.
(시집 ‘지리산 뻐꾹새’, 미래사, 1991)
[시의 눈]
낡은 절간에 위치한 시인은 정적을 맞는다. 고요하고 괴괴한 화면에 사물은 정지돼 있다. 조용한 화면에 별과 달과 포도밭이 조우해 의미의 속살을 풀어나간다. 화자의 시선은 집요하고 끈질기게 사물을 추적한다. 절문 밖으로, 절간 문 위로, 먹물로 번진 산봉우리를 차례로 겨냥하며. 시의 화면은 모순 충돌하는 요소로 인해 상상력의 날개를 부추긴다. 고삐 푼 상상력은 촉수를 번득이며 공간을 거침없이 내달린다. 정적은 허물어지며 변덕스런 여름날씨처럼 머뭇거림 없는 변주를 시도한다. 그만한 거리에 놓인 오브제들이 침묵의 공간을 소리없는 발걸음으로 이동하며 상상을 끌어갈 채비를 마친다. 쏟아지는 별들이 농밀한 포도알로 여문다. 밤새 걸어온 달이 기웃거리며 포도를 딴다. 노란 빛깔에서 짙은 자주 빛으로, 다시 까만 먹물 빛으로 시시각각 인식의 세계가 바뀐다. 조붓한 절간에서 포도를 따는 달을 본다, 담비떼 같은 산봉우리들 웅성거림을 듣는다, 따다 흘린 포도알, 그 구슬 깨지는 소리를 듣는다, 그리고 마침내 산창(山窓)은 돌돌돌 포도즙이 흐르는 계곡 물소리로 물들여진다. 희뿌연 안개구름 너머 숨어있는 절 한 채가 꿈꾸듯 놀라운 만물이 조화하고 호응하는 화엄의 세계를 이루는 것을.
<광주매일신문 윤삼현·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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