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이 올 때 / 박형준
뜰에 첫서리가 내려 국화가 지기 전에
아버지는 문에 창호를 새로 바르셨다
그런 날, 뜰 앞에 서서 꽃을 바라보는 아버지는
일년 중 가장 흐뭇한 표정을 하고 계셨다
아버지는 그해의 가장 좋은 국화꽃을 따서
창호지와 함께 바르시곤 문을
양지바른 담벼락에 기대어놓으셨다
바람과 그늘이 잘 드나들어야 혀
잘 마른 창호지 바른 문을 새로 단
방에서 잠을 자는 첫 밤에는
달그림자가 길어져서
대처에서 일하는 누이와 형이 못 견디게 그리웠다
바람이 찾아와서
문풍지를 살랑살랑 흔드는 밤이면
국화꽃이 창호지 안에서 그늘째 피어나는 듯했다
꽃과 그늘과 바람이 숨을 쉬는우리 집 방문에서,
가을이 깊어갔다
박형준(1966~)
가을이 오면, 시인은 아버지와 국화와 문을 먼저 떠올린다. 시인의 아버지는 “국화가 지기 전” 언제나 문에 창호를 새로 바르셨다. 그런 날, 국화꽃을 바라보시던 아버진 “일년 중 가장 흐뭇한 표정을 하고 계셨”다. 어쩌면 세상의 모든 아버지는 자식에게 문을 만들어주는 존재인지도 모른다(어떤 아버지는 문을 부숴버리기도 하지만). 아버지가 “그해의 가장 좋은 국화꽃”을 따서 “창호지와 함께 바르”던 문은 세상과 시인 사이의 첫 경계였을 것이다.
문은 나와 밖, 가족과 가족 밖, 세상 모든 경계의 시작이다. 밖으로 나가기 위해 나를 잠시 닫아두기도 한다. 아버지는 세상의 안과 밖 경계에서 바람이 쉽게 문을 흔들지 못하도록 지켜준다(어떤 아버지는 멀리 갔다가 바람을 갖고 들어오지만). 시인의 아버지는 “꽃과 그늘과 바람”으로 문을 만들었다. 그 문에는 귀뚜라미 소리, 낙엽 뒹구는 소리, 국화꽃이 “그늘째 피어나는” 소리도 함께 살았을 것이다. 문풍지처럼 흔들리며 우리의 가을도 조금씩 여물어갈 것이다.
[경향신문 이설야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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