쓰레기봉투에 옛 노트 여러 권을 담아 버린 적이 있다. 오래전 일이다. 간직하기엔 노트가 무거웠다. 노트가 품은 시간들이 벅찼다. 시를 읽으며 생각하노니, 정말 옛 노트에 슬프고 아픈 것만 적혀 있었을까? 순하고 정한 마음을 “투명한 개울” 위에 띄우고 혼잣말하는 시간도 있지 않았을까? 빛· 한숨·소망처럼 가볍고 무구한 것도 그 노트에 살고 있었을 게다.
지금은 “간신히 아무도 그립지 않을 무렵”이다. 5월말부터 6월초 “앵두가 익을 무렵”, 홀로 책상 앞에 앉아 있으니 내가 버린 옛 날들이 우르르 몰려올 것만 같다. 버리고 내쳤지만 끝내 잊히지 않은 시간들, 몰려와 하소연할 것만 같다.
옛날은 ‘그때’라는 시간을 품는다. ‘그때’는 무거운 시간이다. 사라졌나 싶다가도 밀려나길 거부한 채 꿈쩍하지 않기도 한다. 화자는 고백한다. “그때 내 품에는 얼마나 많은 빛들이 있었던가.” 옛날은 빛을 품은 사람 하나로 크고 또 아득해진다. 옛 노트는 왜 항상 무거울까? 그것이 ‘그때’라는, 돌아갈 수 없는 시간을 품고 있어서일지도 모르겠다.
이따금 옛 노트를 펼치듯 장석남의 시집을 펼쳐본다. 그러면 가까스로 멀어진 옛날들이 한꺼번에 수런거리며 살아나는 것 같다. 읽다보면 내가 아는 시간, 아는 공간, 아는 사람을 시 속에서 본다. 달리 할 수 있는 일은 없다. 지금은 간신히 아무도 그립지 않을 무렵. 빛나는 주문 같은 여섯 어절을, 더듬더듬 소리내볼 뿐이다. 괜찮지 않지만, 괜찮은 것 같기도 하다.
[농민신문 시인 박연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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