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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요강좌/시의 인문학> 시, 무질서의 질서화

귀촌일기 박뫼사랑 2024. 5. 27. 11:17
<토요강좌/시의 인문학> 시, 무질서의 질서화

시인은 시의 언어를 발명해내거나 창조하는 사람이 아니다. 시의 주제에 맞는 가장 적절한 언어를 발견하는 사람이자 발견한 언어를 잘 조립하는 사람이다. 좋은 시 짓기는 그 작품 속에 어떤 언어를 사용할 것인가를 선택하는 싸움이다. 그러나 세상에 널려있는 온갖 재료로 좋은 시를 만들어 보려고 해도 뭘 어떻게 해야 할지 정리가 되지 않고, 도무지 진도가 나가지 않을 때가 있을 것이다. “어떻게 하면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까?”
나도 “나는 시 쓰는 능력이 안 되나 봐”라는 실의에 빠져서 시 쓰기를 중단한 적이 있을 정도로 누구나 겪는 과정이다.

미술을 전공한 딸이 개인전을 준비하면서 작품의 도록(圖錄)에 써놓은 작가의 말이 눈에 확 들어왔다. “세상의 무질서한 것을 선택하여 형식과 내용을 이중구조로 질서화시키는 작업”이라는 것이다. 이와 같은 개념은 모든 예술에 공통으로 해당되는 것이지만, 내것으로 체화(體化)하는 데에는 소홀히 했던 내용이었다. “이 말 속에 시 짓기의 원리가 모두 들어 있겠다”라는 생각을 했다. 천사의 말이라도 받아들이지 않으면 소용이 없는 것이다. 시에서 말하는 ‘무질서의 질서화’란, J.C.랜섬의 말대로 "어떻게 허다한 말을 줄여서 두 가지 말을 동시에 할 것인가?”라는 문제로 귀결된다. 즉, 이 말을 하면서 정작 하고싶은 저말을 돌려서 말하는 시 짓기의 주된 방법이다.

다시 말해서 눈앞에 보이는 시적 대상은 묘사적 기표로, 그것에서 유추해낸 상상적 이미지는 정서적 기표로서, 독자의 감성과 감각을 자극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시적 아름다움은 사물이 아니라, 상상한 것에서 느껴지는 정서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자면, 누구나 이해 가능한 통속예술이 아니라, 이중구조의 형태를 띠도록 해야 시의 맛을 살릴 수 있다. 아주 간단한 이론이지만 이것이 제대로 되지 않으면 시가 안 되거나 엉성하여 맛없는 시가 된다. 또한 시를 써놓고, 주제 의식이라던지 중심사상, 언어의 알맹이가 잘 조립된 형태인가를 끝없이 살펴보고 도무지 퇴고할 곳이 없을 상태로 퇴고하는 시인정신이 필요하다. 이때, 시적 정서를 예술형식으로 표현하기 위해서는 객관적 상관물을 가져와야 한다는 사실도 잊으면 안 된다. 엘리엇(Eliot, T. S.)이 말한, 표현하고자 하는 정서와 가장 잘 어울리는 어떤 사물이나 정황, 일련의 사건을 제시하는 방법이 제대로 됐는지를 살펴보는 일이다.

시를 끄적이는 일과 완성시키는 일은 다르다. 언어의 경제력을 갖추도록 하는 일이 시를 완성하는 일이라면, 맥없이 이말 저말을 늘어놓은 형태는 글을 끄적인 것이다. 시는, 자꾸 덜어내어서 핵심을 남겨야 하고, 그 언어의 조립에서는 운율을 느낄 수 있어야 한다. 그리고 주제가 짐작될 수 있다면 성공이다. 길게 말해야 하는 소설과는 달리, 말을 억누르면서도 많은 말을 한 것과 같은 효과를 내기 위해서는 암시적으로 말해야 하기 때문이다. 시란 원래 그런 역설적인 문학이다.


이주일의 시인 디카시 한 편 감상

불의 혀
너 때문이었구나

속이 왜 이리 타나 했더니
해마다 왜 더워지나 했더니
가짜뉴스가 왜 퍼지나 했더니


_ 권준영


혀는 불이 될 수도 있고 불을 끌 수도 있다. 말 한마디 잘못하여 관계가 끊어질 수 있고, 천 냥 빚도 말로 갚을 수도 있다. 말에는 능력이 있기 때문에 우리의 말버릇은 내 삶을 결정짓는 가장 중요한 요소다. 좋은 말을 입에 달고 사는 사람은 좋게 풀리지만, 남을 험담하고 항상 부정적으로 말하기를 좋아하는 사람은, 그 삶이 이상하리만치 꼬여서 결국은 불행하게 되는 길을 스스로 만들어 가는 사람이다. 예를 들어서 상처를 주는 충격적인 말은, 당사자의 심장에 화인을 찍은 것처럼 평생 지워지지 않을 수도 있다. 혹, 그 말이 진실이라도 남을 죽이는데 유용한 것이라면 그 혀의 불을 일단 꺼야 한다. 그것이 자기도 살고 상대도 살리는 일이다.

또한 혀는, 하늘을 열 수도 있고 닫을 수도 있다. 실로 세상 모든 일은 혀로 이루어진다고 해도 무리가 아닐 것이다. 그만큼 말은 우리를 지배하고 사회를 지배하고 인간사를 지배하는 힘의 원천이다.

귄준영 시인의 위 시는 사회를 향한 불 같은 외침이다. 오월의 그때를 말하고 있는 듯하다. 길가에서 만난 붉은 잎에서 ‘불의 혀’를 떠올렸다. 그것은 사람을 죽이는 악마의 불같은 것이다. 시간이 지난 지금도 그 불은 위력적이다. 그래서 그의 속이 더욱 타고 해마다 더워진다고 한다. 불이 꺼지지 않으니 더워질 수밖에. 그 불은 가짜를 양산해내는 불이기도 하다. 다시 올 오월의 고개를 몇 번이나 넘어야 할까?

성경에도 ‘불의 혀’가 나온다. 그러나 그 불은 사람을 살리는 불이다. 능력의 불이다. 화합의 불이다. 얼마나 기다려야 우리 사회가 불의 혀로 진실을 말하고 서로 부둥켜안고 눈물로 용서를 빌며 용서 하는 날이 올 것인가? 불가능할 것 같은 일도 자꾸 말하면 말 하는대로 이루어진다. 그것이 마가의 다락방에서 일었던 불의 혀이기 때문이다.

_ 이어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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