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쓰기 공부방

아무것도 들리지 않는 날에도 / 여세실

귀촌일기 박뫼사랑 2024. 4. 5. 11:03

아무것도 들리지 않는 날에도 / 여세실

 

너는 하루 종일 이야기를 지을 수 있고

앞이 보이지 않는 날에도 

노래를 부를 수 있다

 

너를 부르는 목소리에

대답하지 않을 수 있으며

 

믿음 없이도

나아갈 수 있다

 

너는 작은 실잠자리 날개위에서 이 세계를 내려다보며

입을 굳게 닫은 채로

네가 보는 것들을 조금씩 깨뜨려볼 수 있다

 

어떤 갈망 하나를 놓음으로써

자유로부터 풀려날 수 있고

 

그리하여 끝내 네가 원하던 결말 하나를

손에 거머쥐고

실잠자리 날개 위에 앉아

실잠자리가 조종하는 공중에서 바람을 맞을 수 있다

 

그 바람은 너를 잠시 

흩뜨려놓고

 

너는

용서하기를

멈추고

촛불의 일렁거림에 사로 잡힐 수 있다

 

하늘 한조각을 조각내

한모금 들이켤 수도 있고

 

너 자신과 화해할 수 있기도 하지만

영영 벗어날 수 있다는

희망은

끝내

깨진 장독대 사이로 사라진다

 

달력이 한장 넘어간다

오랜 원수를 너의 친구로 받아들일 수도 있지만

 

너는 네가 

너라는 사실을 깜박 잊을 때

 

사랑하지 않을 수 있고

 

너는 너에게

속아 넘어가지 않을 수 있다

 [여세실 '휴일에 하는 용서' 창비 2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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