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요 시 창작 강좌 > 디지털 문학의 신 인류
디카시가 매혹적인 이유는 디지털 문화의 환경에서 영상과 문자를 하나로 결합하여 시적 진폭을 더함으로써 기존 문자시를 더욱 보완 발전시키는 역할을 충분히 해낼 수 있기 때문이다. 이 특성을 잘 살리면 세계적인 문학이 될 충분한 잠재력을 지니고 있다. 또한 ‘지구촌’이라고 불리는 현세에서 단번에 세계적 공유가 가능한 문학으로서의 위력이 점점 커지고 있다. 그러나 우리의 아픈 과거처럼 우리 것을 업신여기는 사대주의적 근성이 있는 일부 문학인은 디카시를 폄훼하는 경우도 가끔 있다. 우리나라에서 발원한 디카시가 세계인의 문학이 된다면 얼마나 가슴 벅찬 일이겠는가? 진정으로 우리나라를 사랑하고 문학을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디카시가 우리나라는 물론, 문학의 한류로 세계에서 인정받는 디지털 시대를 대표하는 시문학이 되도록 힘을 모아야 할 것이다. 일본이 200여 년에 걸쳐 발전 시켜온 '하이쿠'를 단숨에 뛰어넘을 수 있는 문학이기 때문이다.
카메라를 통해서 보는 세상의 풍경은 두 종류뿐이다. 시가 되는 풍경과 시가 안 되는 풍경. 그것을 가르는 기준을 말로 표현하기는 쉽지 않다. 그저 감으로 낚아챌 뿐이다. ‘감’이라는 말이 좀 모호하면 ‘촉’이라고 해두자. 한마디로 본능적인 안테나에 의해서 시가 되는 장면과 시가 될 수 없는 장면을 가려낸다. 물론 그렇게 고른 풍경들이 다 시로 성공하는 건 아니다. 실패하는 경우가 더 많다. 첫째는 자신의 촉에 문제가 있을 수 있고, 둘째는 표현능력에 문제가 있을 수 있다. 하지만 시 쓰기에서는 실패도 하나의 ‘실적’이다. 실패도 시도를 해야 얻어지는 결과이고, 버려지는 게 있어야 남겨지는 것이 있기 때문이다. 쓰는 족족 다 성공한다면 그것은 온전한 성공이 아니다.
디카시도 시일 뿐이다. 시대에 맞는 소통의 방식이다. 소통의 방식에는 소통하려는 자의 철학과 사유가 반영될 수밖에 없고, 새로운 소통의 방식을 취했다는 건 새로운 철학적 사유가 작용했다는 뜻이다. 하지만 내 디카시에 과연 나의 철학이나 사유가 반영된 것인지는 끊임없이 살펴야 한다. 의사소통 방식이 완전히 바뀐 시대에서 디카시야 말로 기호론의 세계가 올 것을 예견한 소쉬르를 다시 떠 올리게 한다.
소쉬르의 언어학 이론을 따라가면, 쉽게 언어를 이해할 수 있다. 가령 우리가 사과라고 부르는 것과 실제 사과 사이에는 아무런 인과관계나 상관관계가 없다. 사과를 그렇게 부르기로 약속한 다음, 둥그스름하고 빨간 과실은 사과라는 이름이 생겼고 그 과실을 사과라 부를 때 모든 사람은 빨간 열매를 떠올린다. 여기서 사과는 ’파롤(parole)‘이며 사과가 가진 고유의 속성(맛, 선악과) 등은 ’랑그(langue)‘다. 시나 디카시도 ‘파롤’을 보며 ‘랑그’로 말하는 양식이라고도 할 수 있다. 그러나 이미 알려진 ‘랑그’가 아니라 시인이 새롭게 해석한 내용일 때 그 힘을 발휘한다.
디카시는 수천 년 동안 언어 체계에 갇혀있던 문학의 한계를 넘어 혁신의 단초가 되었으며, 이미지와 융합한 시대 예술의 총아가 되고 있다. 멀티미디어 시대 형식에 맞물려 전자매체 영상문화 시대의 강력한 장르로 출현한 것이다. 최고의 디지털 기반을 갖춘 한국에서 세계적 보편성을 지닌 디카시가 등장한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이는 실로 문학에 있어 변혁의 시작이며 디지털 시대문학의 큰 발걸음이다.
우리는 지금 문명의 대전환기 속에서 디지털 문명을 새로 쓰고 있는 신인류에 속한다. 4차 산업혁명으로 온갖 사물이 전산화되는 사물 인터넷 시대를 넘어서 챗GPT(대화를 이해하고 자연스러운 답변을 생성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춘 AI로봇) 시대이기에 더더욱 로봇이 따라 올 수 없는 강력한 서정성은 절대적으로 요구된다. 멀티언어와 영상이 합체되어 더욱 깊은 심미적 문학으로 발전해 가야 한다. 디카시가 새로운 소통방식을 선도하고 순간에서 영원을 포착하여 알맹이를 남기는 문학으로 자리잡아야 하는 이유이며 우리가 그 일의 최전선에 있다. 나는 우리의 디카시가 세계를 휩쓸 날이 곧 오리라고 확신한다. <이어산 시인>
■ 이주의 회원 작품
타인의 봄
디카시가 매혹적인 이유는 디지털 문화의 환경에서 영상과 문자를 하나로 결합하여 시적 진폭을 더함으로써 기존 문자시를 더욱 보완 발전시키는 역할을 충분히 해낼 수 있기 때문이다. 이 특성을 잘 살리면 세계적인 문학이 될 충분한 잠재력을 지니고 있다. 또한 ‘지구촌’이라고 불리는 현세에서 단번에 세계적 공유가 가능한 문학으로서의 위력이 점점 커지고 있다. 그러나 우리의 아픈 과거처럼 우리 것을 업신여기는 사대주의적 근성이 있는 일부 문학인은 디카시를 폄훼하는 경우도 가끔 있다. 우리나라에서 발원한 디카시가 세계인의 문학이 된다면 얼마나 가슴 벅찬 일이겠는가? 진정으로 우리나라를 사랑하고 문학을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디카시가 우리나라는 물론, 문학의 한류로 세계에서 인정받는 디지털 시대를 대표하는 시문학이 되도록 힘을 모아야 할 것이다. 일본이 200여 년에 걸쳐 발전 시켜온 '하이쿠'를 단숨에 뛰어넘을 수 있는 문학이기 때문이다.
카메라를 통해서 보는 세상의 풍경은 두 종류뿐이다. 시가 되는 풍경과 시가 안 되는 풍경. 그것을 가르는 기준을 말로 표현하기는 쉽지 않다. 그저 감으로 낚아챌 뿐이다. ‘감’이라는 말이 좀 모호하면 ‘촉’이라고 해두자. 한마디로 본능적인 안테나에 의해서 시가 되는 장면과 시가 될 수 없는 장면을 가려낸다. 물론 그렇게 고른 풍경들이 다 시로 성공하는 건 아니다. 실패하는 경우가 더 많다. 첫째는 자신의 촉에 문제가 있을 수 있고, 둘째는 표현능력에 문제가 있을 수 있다. 하지만 시 쓰기에서는 실패도 하나의 ‘실적’이다. 실패도 시도를 해야 얻어지는 결과이고, 버려지는 게 있어야 남겨지는 것이 있기 때문이다. 쓰는 족족 다 성공한다면 그것은 온전한 성공이 아니다.
디카시도 시일 뿐이다. 시대에 맞는 소통의 방식이다. 소통의 방식에는 소통하려는 자의 철학과 사유가 반영될 수밖에 없고, 새로운 소통의 방식을 취했다는 건 새로운 철학적 사유가 작용했다는 뜻이다. 하지만 내 디카시에 과연 나의 철학이나 사유가 반영된 것인지는 끊임없이 살펴야 한다. 의사소통 방식이 완전히 바뀐 시대에서 디카시야 말로 기호론의 세계가 올 것을 예견한 소쉬르를 다시 떠 올리게 한다.
소쉬르의 언어학 이론을 따라가면, 쉽게 언어를 이해할 수 있다. 가령 우리가 사과라고 부르는 것과 실제 사과 사이에는 아무런 인과관계나 상관관계가 없다. 사과를 그렇게 부르기로 약속한 다음, 둥그스름하고 빨간 과실은 사과라는 이름이 생겼고 그 과실을 사과라 부를 때 모든 사람은 빨간 열매를 떠올린다. 여기서 사과는 ’파롤(parole)‘이며 사과가 가진 고유의 속성(맛, 선악과) 등은 ’랑그(langue)‘다. 시나 디카시도 ‘파롤’을 보며 ‘랑그’로 말하는 양식이라고도 할 수 있다. 그러나 이미 알려진 ‘랑그’가 아니라 시인이 새롭게 해석한 내용일 때 그 힘을 발휘한다.
디카시는 수천 년 동안 언어 체계에 갇혀있던 문학의 한계를 넘어 혁신의 단초가 되었으며, 이미지와 융합한 시대 예술의 총아가 되고 있다. 멀티미디어 시대 형식에 맞물려 전자매체 영상문화 시대의 강력한 장르로 출현한 것이다. 최고의 디지털 기반을 갖춘 한국에서 세계적 보편성을 지닌 디카시가 등장한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이는 실로 문학에 있어 변혁의 시작이며 디지털 시대문학의 큰 발걸음이다.
우리는 지금 문명의 대전환기 속에서 디지털 문명을 새로 쓰고 있는 신인류에 속한다. 4차 산업혁명으로 온갖 사물이 전산화되는 사물 인터넷 시대를 넘어서 챗GPT(대화를 이해하고 자연스러운 답변을 생성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춘 AI로봇) 시대이기에 더더욱 로봇이 따라 올 수 없는 강력한 서정성은 절대적으로 요구된다. 멀티언어와 영상이 합체되어 더욱 깊은 심미적 문학으로 발전해 가야 한다. 디카시가 새로운 소통방식을 선도하고 순간에서 영원을 포착하여 알맹이를 남기는 문학으로 자리잡아야 하는 이유이며 우리가 그 일의 최전선에 있다. 나는 우리의 디카시가 세계를 휩쓸 날이 곧 오리라고 확신한다. <이어산 시인>
■ 이주의 회원 작품
타인의 봄
정녕
나의 봄은
언제쯤 오는 것일까?
즐기지 못하는
봄을 청소하는 사람들
_ 박해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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