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쓰기 공부방

사랑에 속고 / 안정옥

귀촌일기 박뫼사랑 2023. 3. 13. 14:20

사랑에 속고 / 안정옥

 

사랑이 올 때 눈에 몇 겹 씌워지는 무언가가 있어
달싹 붙어
명예도 하찮아지고
빈털터리가 되어도 좋을
세상은 아무것도 아닌
제대로 보이는 것 하나도 없어
서로에 예속됨을 확인한 한참 후에
비로소 제자리 찾고
비계 붙은 사랑 넓어지며
서로가 서로를 몰아
사육하는 사랑 질리게 하여
목 길게 빼고
간혹 들판으로 달리고 싶다
그러나 절망에 누워 있으면 그 사랑은 맨발로 와
한층 두꺼워지고
다시 생활의 무게에 매달려
목숨 같은 사랑 무심해가며
없으면 그리웁고
곁에 있으면 시들하여
새로운 것에 마음 빼앗기고
새로운 것은 늘 신선해서
소나기처럼 젖게 하지만
이내 말라서 날아가고
휘청거리며 돌아오면
문 앞에 그 사랑에 웅크리며 편안해져
쉴새없이 지껄이고 바스락거려

-시집 ‘붉은 구두를 신고 어디로 갈까요’(문학동네) 수록

 

●안정옥 시인 약력

△1949년 서울 출생. 1990년 ‘세계의 문학’ 통해 등단. 시집으로 ’붉은 구두를 신고 어디로 갈까요’, ’나는 독을 가졌네’, ‘나는 걸어 다니는 그림자인가’, ‘웃는 산’ 등이 있음. 애지문학상 수상. <세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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