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용기를 / 노자규
봄 햇살보다 따사롭고
구름보다 포근했던 지난날의
그 시절은 서울에서 한 여자 아이가 우리 학교로 전학 오면서부터
이 이야기는 시작되고 있었다
때는 1974년
"우와 ..이기 뭐꼬?"
"자석 달린 2단 필통 아이가"
도심 속 달동네에 옹기종기 모여 살던 아이들은 서울서 온 친구가 가져온 처음 본 물건에
쉬는 시간마다 신기해 하며 그 아이
입에서 나오는 세상 이야기에 입만 벌리고 있던 친구들 사이로
"뭐하노….
주번은 퍼뜩 칠판 닦아라
국어 받아쓰기 안 할끼가?"
반장이었던 내 말에 아쉬운 듯 자기 자리로 돌아갔지만 그 시선까지는 거두지 못하고 있던 그때
"이빨 샘께서 쫌 있다 온다고 자습하고 있으란다"
그 말이 허공에 채 사라지기도 전에
친구들은 연필심 부러뜨리기 놀이에 빠져들었고
"너거들 그러다 연필심 다 부러지면
받아쓰기 시험은 어찌 칠라 그카는데?"
"반장 말 듣고 보니 그렇네"
"칼도 안 갖고 왔는데"
"녹슨 그 칼로 잘도 깎이겠다."
우리들끼리 실랑이를 벌이고 있을 때
싱긋이 웃고만 있던 전학해 온
그 여자아이는
"얘들아..
부러진 연필 내게로 가져와 봐"
가방에서 요상하게 생긴 걸 꺼내
책상 위에 올려놓더니
잠시 후
부러진 연필심을 처음보다 더 예쁘게
깎아내는 그 물건을 보며
"이게 뭐꼬?
완전 요술 방망이네"
"이건 연필깎이라는 거야"
"우와..억수로 신기하네"
아이들의 마음을 모두 가져가 버린
그 아이는 비라 내리는 구멍 뚫린 하늘만 올려다보고 있는 내게 예쁜 노란 우산을 씌워주고 있었다
"가는 데까지 같이 씌워줄게"
"됐다 마 치아라
이까짓 비에 무슨 우산을 쓰노"
라며
빗물을 튕기듯 뛰어가던 나는
그 아이의 시선이 보이지 않는 곳까지 얼마나 뛰었는지 숨이 차 올라 낮선 집 처마 밑에 숨어 거친 숨을 몰아쉬고 있을때
노란 우산 아래 비친 빨간 장화로
건반을 치듯 빗물을 튕기며 미끄러져 간 후에도
한참을
멍한 눈빛으로 바라만 보고 있었다
“반장.....
오늘 서울에서 전학 온 지선이가
아파서 결석했으니 까네 나중에 선생님이랑 같이 문병 가보자"
"문디 가스나..
지는 우산에 장화까지 신고 간기
꾀병 부리는 것 좀 봐라.."
속으로 되뇌이며
밤을 따라 나선 별이 되어 선생님과 함께 들어간 집은 금방이라도 쓰러질듯한 낡고 허름한 곳이었고
한참을
머물다 걸어나온 내 얼굴은
빨간 사과처럼 물들어 있었고
내 손은 두 귀를 막고 있었다
지선이 아빠 엄마가
교통사고로 갑자기 죽는 바람에
집안은 풍비박산이 났고
갈 곳이 없어진 지선이가
외할머니가 사는 여기까지
떠 내려오고 말았다는 그 말이
사실이 아닐 거라며….
그날 밤
창고에 처박혀 있던 녹슨 자전거에
별칠을 하고 달빛으로 광을 내
학교로 가져갔고 그 자전거는
우리를 하나로 만들어 주고 있었다
“와 말 안했노…?”
“아빠·엄마가 하늘나라로 가시던 날
내게도 남겨진 상처였어“
“인자부터 걱정 마라
이 자전거가 니 발이 되줄꺼니까네“
하늘아래
슬픈 것만 있는 건 아니라며
아직 아물지 않는 다리로 힘들게
걸을 수밖에 없었던 지선이를 태운
자전거는
햇살 고운 하늘이 만들어준 길을 따라
달려 나가고 있었고
내 두 다리에 힘은
어디서 생겨난 건지
샘터에 물방울 고이듯
넘쳐나고 있었다
세상이 햇살에 반짝이는
아침
“지선이가 새벽에 연탄가스 먹어가 오늘 못 나온다꼬 그카데예“
밤과 이별한 아침처럼
허허벌판이 되 버런 내 가슴은
지선이 책상만 바라보다
문득 떠오른 생각에 멀쩡한 고무신을 가위로 찢어낸 자리를 바위에 문대 마치 낡아서 떨어진 것처럼 만들고는
"엄마….
이 고무신 찢어져서 못 신겠다"
되돌아가 가기 싫어하는 계절처럼
소리치던 그 말에 엄마는 다락방에 숨겨둔 새 고무신을 내어주셨고
난 그 찢어진 고무신을 들고 동네 어귀를 벗어나기 전에 엿장수 할아버지가 지나간 자리를 따라 뛰어가고 있었다
"엿장수 할아버지예
이거 받고 엿 좀 주이소"
그렇게 받아 든 엿을 들고 지선이 집
대문을 빼꼼히 내밀고 들어가서는
한적함을 베고 누운 창틈에 놓아두고는 살며시 돌아서려다
엿을 물고 도망쳐 가는 개를
종일 따라다니다 지쳐 집으로 들어온
나는 숨소리조차 낼 기운도 없이 쓰러져 잠이 들고 있었다
겨울나무 끝 가지에 대롱대롱 매달려
있는 일요일이 왔지만 아침을 베고 누워만 있던 나는
밤이 깊어가는 만큼
내맘도 깊어가고 있었고
“지섭아..
소년 중앙 12월호 나왔다 같이 보자“
“지섭아….
우리 동네 아들이 저 밑에 또랑가
아이들한테 딱지치기해서
다 꼴았단다 퍼떡 가보자“
내 마음이 정하는 만큼 지선이에게 향해만 있어 창백했던 그 마음을
눈 녹듯 녹인 것은
슬퍼도 시들지 않는 꽃처럼
지선이가 다시 학교에 나오고 부터였다
“자…. 반장
이거 쭉 나눠줘라“
-채변 검사-
선생님은 이렇게 말씀하시고 계셨다
“오늘 가서 대변을 볼 때 신문지 위에다 보거래이“
지선이 앞에서만큼은
내 똥을 보이기 싫다며
난 밤새도록 타다만 종이처럼 버티다
결국 마당 앞을 지키는 누렁이 변을
담아가고 있었고
“반장 지섭아…
깜박했는데 우야노?“
“안 갖고 온 줄 알면 이빨 샘
난리 날 낀데..“
“내는 아침 일찍 변소에 가서
누가 누다 옆에 묻혀 논거 쪼매 떼왔다“
그때
화장실에 갔다가 채변 봉투를 들고
싱긋이 웃으며 들오던 동석이가
“그라먼 너거들 종이 가꼬 따라온나 내 거 쪼매 퍼주게“
“참말이가?
니는 진정한 내친구데이“
라며
고맙다고 했던 그 마음은
그리 오래가질 못했다
“이놈들 이거
한 놈 똥 갈라서 담아 온 거 아이가?“
“야..임마 쪼매만 찍어오면 되는데
니가 눈 똥을 다 퍼 온거 아이가?“
“ 이거 니똥 맞나?
이거 개똥 같은데….“
선생님의 의심의 눈초리에
고개를 들지 못하고 있는 아이들 중에서
샐까 봐
엄마가 실로 꿰메어 들고 온 아이
주머니에 넣고 온 아이
신발주머니에 넣고 온 아이
친구 가방에 몰래 넣어 온 아이
채변봉투가 터져
가방에 흘러넘친 아이
그날은
온 교실에 똥내가 진동을했고
가방 안에 배인 냄새는
다음 날도
그 다음 날도
우리 가슴에 머물고 있었다
일주일 후
“방동석 김종수 박수석이
이놈들은 누가 친구 아니랄까 봐
배속에 든 기생충도 닮았노“
동석이 똥을 퍼담은 종수와 수석 이는
같이 불려 나가서 빨간 약을 먹어야 했고
“지섭이 니는 배속에 기생충이 뭐가 이리 많노?“
누렁이 똥을 퍼담은 나는
그날 지선이가 보는 앞에서 빨간약
여러 개를 삼켜야만 했다
“뱃속에 회충이 뭐 그리 많니?“
“아이다….
그거 우리 집 누렁이 똥이다“
봄바람 일렁이는 들길을 달려 나가는
두 바퀴에 실은 우리들의 우정은
계절처럼 영원할 것만 같았다
“기섭아…
지선이 할메가 아파서
서울에 있는 삼촌 집으로 간단다“
기억이 연기처럼 빠져나가는
그 말에
언덕 위로 달려간 나는
지는 석양을 지우려 한 줌 무게도 없이 터널 속으로 달려가는 지선이를 실은 기차를 보면서 울먹이며 소리치고 있었다
-30년 후-
풀과 나무
구름과 언덕이 스며 번진
그날 그 자리에 서서
가난했지만
웃음을 잃지 않았던 지난 날
가슴에 날아드는 계절마다
내 인생은 네가 있어 행복했었다던
그날의 그말에…
답장처럼
들려오는 메아리 소리가
내 귓가에 울려 퍼지고 있었다
네가 있었기에
다시 용기를 얻었다고….
펴냄/노자규의 골목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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