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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운을 안긴 시 / 최교

귀촌일기 박뫼사랑 2025. 5. 23. 06:07

행운을 안긴 시 / 최교

 

대갓집 자제들 앞다퉈 그대 뒤꽁무니 쫓았지만
미녀 녹주(綠珠)가 그랬듯 그댄 그저 비단 수건에 눈물만 떨구었지.
귀족 집안에 들어갔으니 거긴 바다처럼 깊은 곳.
그로부터 이 몸은 완전 남이 돼버렸지.
(公子王孫逐後塵, 綠珠垂淚滴羅巾. 侯門一入深如海, 從此蕭郞是路人.)
―‘떠나버린 여종에게(증거비·贈去婢)’ 최교(崔郊·당대 중엽)


미녀를 놓친 한 사내의 체념 어린 넋두리인 듯하지만 사연은 단순치 않다. 귀족 자제들이 반했다는 이 미녀는 원래 시인의 고모 집 여종이었고 둘은 한때 연인 사이기도 했다. 그러다 여종이 양주사마(襄州司馬) 우적(于頔)의 집안에 팔려 가면서 둘은 서로 남남이 되고 말았다. 이게 시에 나타난 사연의 전모다. 한데 이 시에 뒷얘기가 따른다. 심해처럼 깊숙한 곳에서 눈물만 떨구던 미녀를 우연히 재회하게 되자 시인은 그간의 응어리를 이렇게 시로 풀어냈다. 뜻밖의 반전. 시를 접한 우적이 둘의 사연을 듣고는 미녀를 방면했고 혼인까지 주선해 준다. 시 한 수로 사랑을 되찾았다는 이 일화는 범터(范攄)의 ‘운계우의(雲溪友議)’에 수록돼 있다. 소설집이라 호사가의 취향에 맞춰 윤색이 가해졌을 가능성이 없지 않다.
녹주는 서진(西晉)의 부호 석숭(石崇)의 애첩. 후일 왕공(王公)의 집안에 끌려오자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는 여인으로 한시에서는 비운의 미녀로 통용된다. 시 속의 ‘이 몸’은 원문이 ‘소랑(蕭郞)’이다. 양무제(梁武帝) 소연(蕭衍)을 일컫는데 미남 혹은 총각의 대명사로 쓰인다.

 [동아일보 이준식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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