합평의 시간

그리움 / 이용악

귀촌일기 박뫼사랑 2025. 4. 8. 13:17

그리움 / 이용악(李庸岳1914 - 1971)

 
눈이 오는가 북쪽엔
함박눈 쏟아져 내리는가
 
험한 벼랑을 굽이굽이 돌아간
백무선 철길 위에
느릿느릿 밤새워 달리는
화물차의 검은 지붕에
 
연달린 산과 산 사이
너를 남기고 온
작은 마을에도 복된 눈 내리는가
 
잉크병 얼어드는 이러한 밤에
어쩌자고 잠을 깨어
그리운 곳 차마 그리운 곳
 
눈이 오는가 북쪽엔
함박눈 쏟아져 내리는가

 

이용악의 시 〈그리움〉은 그가 지닌 북향의 정서—즉, 분단 이후 고향을 그리는 이산의 정서—를 절절하게 담아낸 작품입니다.
읽는 내내 마음속 어딘가가 서늘하게 시리고, 또 뜨겁게 저며오는 그런 시예요.


시 감상과 해석

1. “눈이 오는가 북쪽엔 / 함박눈 쏟아져 내리는가”

  • 시는 되풀이되는 의문으로 시작하고 끝나요. 이 반복은 단순한 질문이 아니라, 확인할 수 없는 고향에 대한 깊은 그리움과 애타는 마음을 상징합니다.
  • ‘북쪽’이라는 말에 이미 이 시의 시대적 배경이 드러나 있죠. 분단된 조국, 갈 수 없는 고향.

2. “험한 벼랑을 굽이굽이 돌아간 / 백무선 철길 위에…”

  • ‘백무선’은 과거 함경북도 회령에서 무산까지 이어진 철도로, 화자의 고향 혹은 추억의 길을 연결하는 상징입니다.
  • ‘험한 벼랑’, ‘굽이굽이’라는 표현은 고향으로 가는 길이 얼마나 멀고 험난하며, 이제는 단절된 것인지 보여주죠.

3. “화물차의 검은 지붕에…”

  • 화려하거나 낭만적인 이미지 대신, ‘화물차’와 ‘검은 지붕’은 거칠고 무거운 현실감을 부여해요.
  • 밤새 눈을 맞으며 ‘느릿느릿’ 달리는 화물차는 마치 지워지지 않는 기억의 무게, 혹은 끊어진 고향과의 연결을 간절히 이어보려는 마음처럼 보입니다.

4. “너를 남기고 온 / 작은 마을에도 복된 눈 내리는가”

  • 여기서 '너'는 고향, 혹은 고향에 남겨두고 온 누군가, 또는 그 모든 것의 상징일 수 있어요.
  • “복된 눈”이라는 말은 눈을 희망이나 축복의 상징으로 승화시켜요.
    → “그곳에도 평화와 따뜻함이 깃들기를” 바라는 화자의 다정한 마음, 기도 같은 문장이죠.

5. “잉크병 얼어드는 이러한 밤에…”

  • 지금 이 시를 쓰는 밤, 현실은 춥고 고독합니다.
  • 잉크병이 얼 정도의 추위 속에서도, 그는 잠을 깨 그리움에 시달리고 있어요.
  • **‘어쩌자고’**라는 구절은 너무 인간적이죠. 어떻게 할 수도 없는 이 그리움이 자조와 체념, 그러나 떨쳐낼 수 없는 감정임을 보여줍니다.

6. “차마 그리운 곳”

  • ‘차마’라는 부사 하나가 이 시의 정서를 강렬하게 압축합니다.

감당할 수 없을 만큼, 혹은 감히 마음속에 떠올릴 수도 없을 만큼 아프고 멀고 간절한 존재가 된 고향.

 마무리 감상

이 시는 이용악 특유의 담담하지만 깊은 울림, 슬픔 속에 깃든 다정함, 그리고 이산의 비극을 언어로 어루만지는 힘이 고스란히 느껴지는 작품이에요.

읽고 나면, 누구든 마음속에 자기만의 '차마 그리운 곳' 하나쯤 떠올릴 수밖에 없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