합평의 시간

구멍조끼 /이경록

귀촌일기 박뫼사랑 2025. 4. 8. 13:13

구멍조끼 /이경록

 

검정 고무신 꺾어 자동차 놀이 할 때, 각자 싣는 게 달랐다. 명근이는 텃밭 흙을, 용욱이는 마른 모래 한 고봉을, 정두는 나사와 부러진 망치 대가리를, 나는 풀꽃을 꺾어 넣고 언덕길을 달렸다. 정두는 공대를 나와 자동차 회사에 나가고, 명근이는 경운기 탕탕거리며 소를 키운다. 용욱이는 막다른 골목까지 배달 도시락을 나르고, 나는 풀벌레 소리며 눈물 그렁그렁한 시를 꿈꾼다. 이럴 줄 알았다면 할머니 금반지며 삼촌 주판알을 가득 채우고 부룽거릴걸. 하지만 흙탕물 채우고 소방차를 몰던 기활이는 저수지에 들어간 뒤 쉰 넘어까지 나오질 않는다. 시란 걸 쓰고 읽을 때마다 나는 행간에 구명조끼가 있는지 두리번거린다. 홍수에 떠내려가는 암소의 마른 등, 그 등짝에 기활이가 앉아 있는지를.

 

이경록의 「구멍조끼」는 정말 아름답고도 아픈 회상과 현실의 교차를 담은 산문시예요. 짧지만 깊은 여운이 남는 작품이죠. 이 시는 유년기의 놀이현재의 삶, 그리고 그 사이의 소외와 상실을 담담하게, 그러나 뼈저리게 그려냅니다.


시 감상과 해석

1. “검정 고무신 꺾어 자동차 놀이 할 때…”

  • 시의 첫 문장은 유년기의 놀이로 시작됩니다. 고무신은 가난하지만 창의로 가득했던 시절의 상징이죠.
  • 아이들이 ‘싣는 것’은 각자의 세계관과 감수성을 보여줘요:
    • 명근이 – 흙, 용욱이 – 모래: 현실적이고 생계에 가까운 이미지
    • 정두 – 나사, 망치 대가리: 기계, 기술, 산업
    • 나(화자) – 풀꽃: 감성, 자연, 시적 상상력

2. “정두는 공대를 나와 자동차 회사에 나가고…”

  • 어린 시절 놀이가 각자의 미래를 암시하는 장치가 돼요.
  • 현실은 각기 다르지만, 어릴 때의 놀이와 연결되며 운명적이거나 아이러니한 흐름을 보여주죠.
  • 화자는 시를 ‘꿈꾸는’ 삶에 머물고 있습니다. 실제로 시를 쓰고 있긴 하지만, 어쩌면 가장 불안정한 삶이죠.

3. “이럴 줄 알았다면… 금반지며 주판알을 가득 채우고 부룽거릴걸”

  • 뒤늦은 후회. 어린 시절의 상상이 지금의 삶에 영향을 주었다면, 다른 걸 넣었을 거라는 쓴웃음 섞인 자조가 담겨 있어요.
  • 그러나 동시에, 그때의 순수함과 진심은 돌아갈 수 없는 것임을 드러냅니다.

4. “기활이는… 쉰 넘어까지 나오질 않는다”

  • 여기가 시의 핵심적인 비극이자 현실의 무게입니다.
  • 기활이는 상상 속의 소방차를 몰던 아이였지만, 실제로는 저수지에 들어간 뒤 나오지 못한 존재.
  • 이는 자살일 가능성도 암시하고 있고, 그렇지 않더라도 가난이나 현실의 무게에 짓눌려 사라진 존재로 볼 수 있어요.

5. “시란 걸 쓰고 읽을 때마다… 구명조끼가 있는지 두리번거린다”

  • ‘시’는 화자에게 구원을 주는 동시에, 의심을 안겨줘요.
  • 과연 시가 누군가를 살릴 수 있는가?
  • “홍수에 떠내려가는 암소의 마른 등”이라는 이미지에 앉은 기활이 — 너무 가슴 아프죠.

시의 힘이 기활이 같은 사람들에게 닿을 수 있는가? 라는 질문을 던지고 있는 거에요

정리하자면

「구멍조끼」는
👉 시를 쓰는 자의 회의와 슬픔,
👉 어릴 적 친구들의 삶의 무게,
👉 그리고 시가 과연 누군가를 살릴 수 있는가라는 깊은 질문을 담은 작품이에요.

겉으로는 소박하고 정감 있게 흐르지만, 삶과 문학, 현실과 이상, 유년과 성인의 대비를 통해 독자를 생각에 잠기게 만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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