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쓰기 공부방

2025 신춘문예 시 당선작

귀촌일기 박뫼사랑 2025. 1. 3. 14:20

2025 신춘문예 시 당선작

<2025 중부광역신문 시 당선작>

이끼의 날들 / 이승애
​​
흩어진 뼈를 일으키는 건 습기입니다 수억 년 전 물에서 태어나

기댈 곳 찾아 뭍으로 온 우리는 태초의 냄새를 기억합니다

음지는 우리의 몫이지요

음습한 골목길, 물에 젖은 하루가 절뚝이며 지나갑니다

언젠가 불렀던 곡조는 밟히고 또 밟혀도 살아납니다 노래가 아닌


그 한 소절을 흘리며 골목 끄트머리로 사라질 때 멀리서 바라본 혼

자만의 은밀한 기억을 녹이면 어둡고 축축한 그늘 맛이 납니다

막막함에도 내성이 생기는 걸까요

빛은 어차피 우리의 핏줄이 아니기에

더는 숨길 수 없는 조짐이 파랗게 피어오르면 하나가 됩니다
눅눅하고 미끄러운 예감으로 같은 종족을 알아봅니다

세상에서 소외된 분노는, 짓밟는 발목을 뿌리치거나 썩은 나무나

그늘진 바위를 덮기도 하지요 이때 우리의 피는 온통 뜨거운 녹색입니다

한 사내가 끊어진 노래를 기타 하나에 담아두고
뒷것이 되었지요

잎과 줄기 구분 없이 바닥이나 틈을 붙잡고 납작한 숨을 쉽니다 피가

마르면, 끝내 사라질지라도

 

<2025 한국불교 신춘문예 시 당선작>

정중동静中動 / 대활스님


고개 걸린 흰구름
걷힐 생각 없고

솔향 실바람
열린문 닫는다

깊게 타든 촛불
꼬리를 흔들고

게으른 산승山僧
긴하품 몰아 쉰다

다리다 만 녹차향
골방을 맴돈다

 

<국제신문 시 당선작>

적당한 힘 / 김도은


새를 쥐어 보았습니까?

새를 쥐고 있으면
이 적당한 힘을 배우려 학교엘 다녔고 친구와 다퉜고
매일 아침 창문을 열고 온갖 소리를 가늠하려 했었던 일을 이해하게 도니다

온기는 왜 부서지지 않을까.

여러 개의 복숭아가 요일마다 떨어지고
떨어진 것들은 정성을 다해 멍이 들고 꼼지락거리는
애벌레를 키운다

서로 다른 힘을 배치하는 짓무른 것들의 자세
새로운 패를 끼워 넣고 익숙한 것을 바꿔 넣으면
손을 빠져나간 접시가 깨졌고
칠월이 손에서 으깨어졌고
몇몇 악수가 불화를 겪었다

세상의 손잡이들과 불화하든
친교를 하든
모두 적당한 힘의 영역이었을 뿐
몰래 쥐여준 의심과 아무렇게나 손에 쥐고 있던 새의 기록에서
별똥별을 본다

적절한 힘을 파는 상점들이 있었으면 해
포장도 예쁘게 해서
심지어 택배로 보낼 수 있었으면 해
평평하고 고요한 힘
고요해서 막다른 골목만큼 지루하고 착한 힘

모자라거나 딱 맞는 힘이 아니라
오르막을 오를 때 내리막 힘을 딛고 올라가려 하는,
내가 알지 못하는 모든 일들을 데려오거나
데려간 그 힘.

손 닿는 곳마다 손잡이가 있는 건 아니니까
하루를 조금 더 올라가 보려는 거겠지

한 발 한 발 올라간다고 해서 다 볼 수 잇는 건 아니니까
삐딱하게 어둠이 잡음으로 끼어들어도
멈추지 않으려는 거겠지

불편한 새를 손에 쥐어 보기 전에
적당한 힘 하나 손금으로 열러두어도 괜찮은

 

<국제신문 시조 당선작>

수어 배우기 / ​김이령


손끝에서 부푸는 말
둥글게 빚어진다

듣지 못한 아이들은
손으로 글썽이고

모음은 부스러기가
많아서 따스하다

창밖엔 소리 없이
떠다니는 흰 눈들

손으로 빚어놓은
새들이 눈을 뜨면

첫 눈은 입을 벌린 채
가만히 녹아간다

침묵으로 세상은
환하게 오는 거라

꿈결에 처음 듣는
자신의 목소리에

말들은 잇몸을 가져
벙긋이 태어난다

 

<부산일보 시 당선작>


애도 / 이희수



거대한 알이 깨지고 흰자처럼

달이 흘러나왔다 어둠이 왔다

여자는 폐건전지를 투명하고 긴 통에 모은다 위험한 유리 기둥이 나타난다 고요로 쌓은 돌무덤과 따로 함께였다가 함께 혼자인 구석이 생겨난다 주석이 본문보다 더 긴 하루이다 분리 수거를 마친

여자는 댓글을 읽는다 잘근잘근 씹으며 누군가를 죽이는 잔뜩 벌린 입이 있다 냉장고 문 손잡이를 잡고 여자는 가만히 얼어붙는다 쥐도 새도 모르게 누군가 죽어가는 꾸욱 다문 입이 있다 거대한 얼음이 냉장고에서 걸어나와 빙수 기계에 올라앉는다 뼛가루가 수북해질 때까지 돌리고 돌려도 끝끝내 보이지 않는다 어디로 갔을까

여자는 새발뜨기를 한다 새는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발자국을 찍고 시접은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닫힌다 옷감은 희고 발자국은 푸르다 끝단이 닫히고 쌀무더기에 새발자국이 찍힌다 바느질을 끝낸

여자는 부러진 손톱을 금 간 식탁 유리에 올려놓는다 추억을 새기듯 꽃물을 들여도 길어난 시간은 잘려 나간다 손톱을 깎는 동안 곰팡이가 빵을 먹어버린다 좋은 빵인 줄 알게 된 순간 버려야 할 빵이 된다 좋은 사람일지 모른다는 예감은 둘 사이에 균열이 생기고 난 뒤에야 찾아온다 여자는 식탁 유리를 갈기로 한다 차가운

유리 기둥 안에 장기를 기증한 시신이

들어 있다 제대로 버리는 일이 남았다

 

<부산일보 동시 당선작>


범선 한 척 / 황세아



하굣길에 종종 마주치던
우석삼촌은
기우뚱 기우뚱
몸을 흔들면서 걸었다

매번 삼촌 지나갈 적마다
홍해 갈라지듯
확 트인 골목 양 쪽에서
속삭이듯 들려오던 얘기들

ㅡ교통사고였댔지?
ㅡ응, 몇 년 안 됐어
ㅡ가족들도 다 떠났대
ㅡ요샌 폐지도 모으나봐
ㅡ어제 리어카 끄는 거 봤어
ㅡ젊은 사람이 에휴 쯧쯧쯧

수군수군 출렁이는
홍해의 물살 위로
돛처럼 곧추세운 옷깃
힘차게 펄럭이며
장애인 구직신청서
양 손에 꽉 쥔 채
주민센터로 나아가는

호호탕탕



범선 한 척!

 

<오륙도신문 시 당선작>

허수아비 / 박상철



눈물이 없다고 가슴까지 메마른 건 아니다
바람에 흔들리지만 마음은 굳건하다
때때로 혼자 뭉게구름을 타고 올라
온 들녘을 다녀도 발자국을 남기지 않는다
바람에 찢긴 누더기
외로움에 부러진 가지를 놓지 못하고
너덜너덜해진 팔
새들은 제 세상인 양 집을 짓는다
우거진 수풀 사이
내 겨드랑이는 종달새 집
바람에 기울어진 몸이
몇 몇 새를 쫓지 못하고 동거를 허락한다
오래된 들녘에 덩그러니 나는 버려져 있어
빈 방을 안고 몰래 나간 새들을 기다린다
커튼을 올려도 소식 없는 아이들처럼
나는 독거노인이 되어 저물녘 소멸을 노래한다

 

<오륙도 신문 시조 당선작>


비대칭 모임 / 한 정



하현달 기울다가 벽에서 일그러질라
급하게 서두르면 평면 사이 어려운
길 하나 사이에 두고 금 쩍 가면 난감하지
파도가 밤새도록 벼린 날 집어삼켜
현 위치 가늠 못 해 어느 때 낮이 올지
끝과 끝 서로 맞닿아 부메랑이 되어올까
바다는 마음 없이 가만히 두고 볼 일
야위다 풍성하다 저 혼자 여유롭게
선대칭 데칼코마니 회전축에 포갠다

 

<오륙도신문 동시 당선작 2>

나 좀 어떻게 해줘 / 차상영



기다란 밭이랑에
쭉 뻗은 고구마 줄기
갈햇살 받아먹고
늘어지게 낮잠 자요
나 언제 밖으로 나가요
땅속에서 중얼중얼
탱그르 잘 익은 호박
떨어질까 조마조마
꼭지에 매달린 몸
쑤욱 힘 빠지겠어
맨땅에 엉덩방아 찧을라
얼른 나를 안아줘


무인 문구점 / 김경아



천리안 눈을 가진 에이아이 알바생
뱅글뱅글 고개 돌려 손님을 맞이해요
계산을 도와준다며 자꾸 말을 걸어요
바코드와 에이아이 춤추는 작은 무대
나보고 자꾸자꾸 눈을 꼭 맞추래요
사람은 안 보이지만 온기가 피어나요

 

< 불교신문 시 당선작>


산사 / 최원준



범종 소리에

겨울 은사시나무가 흔들리고

송백에 남아 있던 가느다란 푸른 선이 흔들리고

밤을 지켜보던 소쩍새 눈동자 흔들리고

범종 소리는

옹송그리며 가지에 점으로 앉은

꽃봉오리를 툭 하고 건드리고

툭 하고 밀치다가 서로 얼싸안기도 하고

그리하여

범종 소리에

소스라치게 놀란 매화나무는 가지에

꽃을 점점이 피워낸다.


고요가 있고, 적막이 있고

그 속에 소란이 있고

달빛이 돌그림자를 움직이는 동안

범종 소리에

계곡은 파문을 일으키고,

바람 따라 그 소리 배회하다가

팔상도 쓰다듬으며

부처님 안전에 매화향 전해주면

범종 소리에

밤은 끝을 비추고

동쪽 산은 붉은 점안식 준비를 재촉하였다.

 

< 조선일보 시 당선작>

아름다운 눈사람 / 이수빈



선생님이 급하게 교무실 이곳저곳을 돌아다니신다 나는 두 손을 내민다 선생님이 장갑을 끼워주신다 목장갑 위에 비닐장갑을 끼우고 실핀으로 단단히 고정해주신다 나는 손을 쥐었다 편다 부스럭 소리가 난다 마음 편히 놀아 선생님이 말씀하신다

운동장 위로 얕게 쌓인 눈 새하얗고 둥글어야 해 아이들이 말한다 눈을 아무리 세게 쥐어도 뭉쳐지지 않고 흩어진다 작은 바람에 쉽게 날아간다 흙덩이 같은 눈덩이를 안고 있는 아이들 드러누워 눈을 감고 입을 벌리는 아이들 나는 조심스럽게 눈을 다룬다 개를 쓰다듬듯 품에 안은 채 몇 번이고 어루만진다 눈덩이가 매끈하고 단단해진다 아주 새하얗고 둥근 모양의 완벽한 눈덩이를 갖는다

눈덩이가 내 품속에 있어서 나는 세상을 다 가진 것 같고 그 세상이 아름다운 것도 같고 서툴지 않은 피아노 연주 소리가 들려오는 것 같기도 한데

하고 있던 목도리를 푼다 모자를 벗는다 장갑은 잘 벗겨지지 않는다 내 눈사람은 너무 잘 챙겨입어서 더 이상 눈사람 같지 않다 주위를 둘러보니 아이들은 교실로 돌아가고 없다 밟히고 파헤쳐져 더 이상 하얗지 않은 운동장을 본다

선생님 제 눈사람이 가장 새하얗고 둥글어요 그리고 또 커요 나는 말하고 선생님은 오랫동안 내 눈사람을 바라보신다 어찌할 수 없어서 울고 싶은 듯한 표정으로 선생님이 서 계신다 나는 선생님을 이해할 수 없지만 같이 울상이 된다 이 순간을 지워버리려는 듯이 하늘에서 눈이 펑펑 내린다

 

<조선일보 동시 당선작>


엘리베이터를 타면 / 김지나



사람이 들어갈 수 있는 네모 중에서
가장 작은 네모
엘리베이터 안에서는요
안녕하세요!
인사해요
두 손 가득 장 보고 돌아오는 할머니께서 타시면
안녕하세요! 인사하고 이렇게 여쭤봐요
몇 층이세요? 눌러드릴게요!
귀여운 강아지 품에 꼭 안고 어떤 누나가 타면
안녕하세요! 안녕 강아지야! 인사하고 이렇게 물어봐요
귀여운 강아지야 너는 몇 층이니? 내가 눌러줄게!
나보다 먼저 내리거나
내가 먼저 내릴 때에도
잊지 않고 인사해요
안녕히 가세요!
가끔은 아무도 없는 엘리베이터를 혼자 타기도 하는데요
22층 우리 집까지 올라가는 시간이
참 조용하고 길게 느껴져요
이대로 우주까지 가버리는 건 아닐까 생각하다가
거울과 눈이 마주치면
오늘 하루를 열심히 보낸 내가
나를 보고 있어요
나는 나를
3초 정도 가만히 보다가
웃긴 표정을 짓기도 해요


 

<조선일보 시조 당선작>


취급주의 / 한승남



계단을 오르내리며 슬픔을 운구한다
얼굴 없는 수취인 이름도 희미해졌다
똑똑똑 대답 없는 곳
긴 복도가 느려진다
저 많은 유품들은 누가 보내는 걸까
주문을 외우면 외로운 착각의 세계
반품도 괜찮을까요
열지 못한 사연들
상자도 사람도 구석에서 자라고 있다
유리 같은 마음입니다 던지지 마세요
날마다 포장된 시간
기적을 쌓는다

 

<농민신문 시 당선작>


모란 경전 / 양점순



나비는 비문을 새기듯 천천히 자수 병풍에 든다
아주 먼 길이었다고 물그릇 물처럼 잔잔하다
햇빛 아지랑이 속에서 처음처럼 날아오른 나비 한 마리

침착하고 조용하게 모란꽃 속으로
모란꽃 따라 자라던 세상사랑채 여인 도화의 웃음소리
대청마루에 할머니 무릎을 베고 누운 아이
모란 그늘 흩어지는 뒤뜰

흐드러지게 피는 웃음소리
그녀가 갈아놓은 먹물과 웃음을 찍어 난을 치고
나비를 그려 넣는 할아버지

상처를 감춘 꽃들이
할머니 손끝에서 톡톡 핏빛으로 핀다
어떤 날은 긴 꼬리 장끼와 까투리가 태어난다

어디서나 새는 태어나고 어디서나 날아가 버리곤 한다

모란이 핀다, 모란이 핀다

붉은 꽃잎을 따서 후하고 불어 보는 아이
꽃잎은 빙빙 돌며아랫집 지붕 위로 날아간다
그 집 할아버지가 죽었다고 한다

모란 꽃잎 불어 날리는 날이면
어디선가는 사람이 죽고 부음이 날아든다

도화도 죽었으면 좋겠어 좋겠어
차마 꽃잎을 뜯지 못한 어린 손가락이 붉다

한밤중 아무도 모르게 사라진 도화
가지런히 벗어놓은 신발 속에는 붉은 말들이 무성했다
제 신발 속에 가시를 잔뜩 집어넣었을 때도
아이의 두 손을 따뜻하게 쥐고 웃었다

죽음을 이해하는 일
떨어진 꽃잎 한 장이
바람도 없이 날아간다는 것

모란이 핀다, 모란이 핀다
병풍 속 나비는 물처럼 고요하다

 

<농민신문 시조 당선작>


어떤 광합성 / 김영곤



병실에 누워있다, 깡마른 나무 한 그루
한뉘 내내 둥근 세상 사각 틀로 깎아내다
제 몸을 보굿*에 끼워
몸틀처럼 앙버티는,

무엇을 기다릴까, 천 개의 귀를 열고
한 번도 부화하지 않은 톱밥의 언어들이
끝내는 해독 못한 채
침묵 속에 갇히고,

저 왔어요 한 줌의 말 광합성이 되는 걸까
핏기 잃은 가지에서 붉은피톨 감돌 때
고집 센 심장박동기
뿌리째 팽팽해지는,

무척산에 옮겨 심은 우듬지 저류에서
썩지 않는 후회가 시간의 뺨 데우며
절단된 둘째손가락
단풍 빛깔로 손 흔드는,

*보굿:나무껍질의 순우리말.

 

<경향신문 시 당선작>

토마토가 보이는 것보다 가까이 있음 / 안수현




윗집은 오늘도 많이 더운가 보다
아무렇게나 잘라두어 우리 집 창문에 아른거리는
에어컨 실외기 호스에서
물이 뚝뚝 떨어진다 엄마는 시끄럽다면서도
마른 토마토 화분을 물자리에 밀어둔다

새순 발끝을 받치고 있는 큰 줄기
손끝이 새파랗다
너를 이렇게밖에 밀어올리지 못해 미안하다고 하는
누군가와 닮았다

왜 자꾸 안쓰러운 표정을 짓는 걸까,
그냥 그렇게 된 건데 우린
순진한 토마토일 뿐인데

어차피 충분히 어른이 되면
고개를 깊이 숙이고
자신을 떨어뜨려야 할 텐데

땅에서 났으면서도
먼 하늘만 보고 자라
땅에 묻히기를 두려워하는
엄마 없는 엄마와 엄마밖에 없는 딸

토마토는 어디에서든 뿌리를 내린다
홀로 오래 있었던 토마토 과육에선
제 심장을 디디고 선 싹이 자라곤 한다
해묵은 양수를 받아마시며,

그것은 꽤나 외로운 일이다
그래도 토마토는 그렇게 한다

 

<한국일보 시 당선작>

가담 / 박연



우, 너는 언젠가 영가들은 창문으로 다닌다는 말을 했지. 그 뒤로 밤이 되면 커튼을 쳐두었다.
낯선 영가가 갑자기 어깨를 두드릴까 봐.

두려운 일은 왜 매일 새롭게 생겨날까. 가자지구에서 죽어가고 있는 사람들. 소년들은 처음 보는 사람을 쏘았겠지. 총알이 통과한 어린 이마와 심장. 고구마 줄기 무침 먹으면서 봤다. 전쟁을 멈추지 않는 나이 든 얼굴들.


산 사람이 죽은 사람을 빌미로 이익을 얻으려 한다는 말을 들었어. 맨발로 거리를 걷고 싶다. 너는 내가 추워할 때 입김을 불어줄 테지. 거리에서

나무를 보호하기 위해 입혀 둔 스웨터를 보자. 보라색 바탕에 웃는 얼굴이 수놓아져 있던 스웨터를 기억해? 표정이 어딘지 모르게 음흉해서, 음흉이라는 이름을 붙였잖아.

세상에 그런 음흉만 있다면 어떨까. 나무를 따뜻하게 해 줄 거라는 속셈이 이 세계에 숨겨진 비밀의 전부라면. 나는 여전히 좁은 틈 사이로 새어 들어오는 빛을 본다. 그리고 그런 것을 아름답다고 생각하는 스스로를 오래 미워하고 있어.
어디로 걸어야 할까. 방향이란 게 있을까.

어디든 사람을 살리는 쪽으로. 더 많은 숨을 살릴 수 있는 쪽으로. 와중에 스스로를 사라지지 않게 할 수 있다면. 너는 뭐가 아름다운 장면이라고 생각해? 흩날리는 게 눈송이인 줄 알았는데 실은 이웃의 뼈를 태우고 남은 재였던 날?

갚을 것이 없는데도 자꾸만 갚으러 오는 아이들이 즐비했던 문구점
그곳에서 우리는 소란스러운 귀를 훔치는 아이들이었지. 더 이상 훔칠 귀가 없는데도 서성이기를 멈출 수 없는

어째서 세계의 비밀을 듣는 놀이를 즐겼을까
옆 나라의 수장이 계속해서 무기를 사다가 결국 소년들을 팔아버렸다는 거
어떤 사람이 죽었다는 사실이 조용히 잊힌다는 것
말을 아끼는 동안
너는 산뜻한 손짓으로 엉덩이에 묻은 흙을 털었다
떠나지 않고 계속해서 넘어지기를 결심한 얼굴이었다

자꾸 밭은 숨을 쉬게 돼
우리 심장은 우리의 가슴이 아니라 죽어가는 이들에게 있으니까

*

우리의 얼굴을 한 영가가 창문을 두드린다

 

 

<한국일보 동시 당선작>


뱀 꿈 / 안지현



뱀에 물리거나 뱀을 죽이는
꿈을 꾸면 사람들은 좋아하지
바라던 일이 이루어지는 뱀 꿈
은 너무 좋아 뱀도 꿔

피아니스트가 되고픈 뱀 꿈
자전거 챔피언이 되고픈 뱀 꿈

간절한 꿈속 자기를
물고 또 물고 죽고 또 죽이며
작아진 허물 벗을 때마다
선명하고 매끄러워지는 뱀

피아노 속으로 들어가네
온몸이 손이라
자전거도로로 뛰어드네
온몸이 발이라
기다란 몸 꿈틀거리네
온몸이 가슴이라
온몸으로 꿈꾸는 뱀은
기어가는 꿈 한 마리
소리 지르지 말아 줘
꿈이 꿈 이루는 중이니까
뱀 꿈꾸는 뱀 꿈 이루어지는 꿈
뱀 꿈

 

<서울신문 시 당선작>


디스토피아 / 백아온



플라스틱 인간을 사랑했다. 손등을 두드리면 가벼운 소리가 나는. 그는 자신에 대해 말하지 않았고 말할 수 없었다. 그 대신 자기가 피우는 카멜 담배의 낙타가 원래는 이런 모양이 아니었다거나 레몬청을 시지 않게 만드는 법 같은 것들을 말해줬다. 나는 그의 말들을 호리병에 넣어두었다. 언젠가 그것들로 유리 공예를 하고 싶었다.

매일매일 그를 만나 그의 이야기를 들었다. 그는 말이 많은 사람이 아니었지만, 그의 이야기가 끝나갈 무렵에는 항상 쇼윈도 불이 꺼지고, 조명 상가들도 문을 닫았다. 집에 돌아가면 투명한 호리병을 한참 바라보다 잠이 들곤 했다. 그의 작은 이야기들을 모아둔 호리병을.

그와 있다 보면, 아주 잠깐이지만, 세상이 진짜라고 믿어졌다. 그도 마찬가지였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망가진 두 사람이 서로에 의해 회복되는 우울한 로맨스 영화처럼.

우리 사이에 아이가 태어난다면요, 내가 엄마를 찾아볼게요.

어느 날은 그늘에 있기엔 너무 추웠다. 날씨는 좋았지만 바람이 찼다. 당신도 춥지 않아요? 물어보려던 것을 꾹 삼키고 말았다. 나는 그 공원에서 덜덜 떨며 그가 얘기하는 것을 들었다. 오랜만에 행운목에 물을 주고 왔어요. 행운목은 물을 자주 주지 않아도 잘 살지요. 나는 가만 듣다가

당신은 왜 이렇게 나에게 관심이 없어요? 나라고 아무런 사연도 없는 줄 알아요? 화가 치밀었다. 그동안 그가 자신에 대한 이야기를 한 건 아니었다. 나는 그의 사연이 알고 싶었고, 그 역시 나의 사연에 대해서도 궁금해하길 바랐다. 그늘에서 바깥으로 걸어 나갔고 그는 벤치에 그대로 앉아서 텅 빈 손을 흔들었다.

그를 정면에서 본 것은 처음이었다. 그의 플라스틱 피부에 덧칠된 이목구비와 단 하나의 표정을 보았다.

가까운 미래에 사랑이 있을 거라고 줄곧 생각해 왔는데. 지금껏 그와 나 둘 중 누구도, 서로에게 안기지 못했다는 게 믿기지 않았다. 나는 우리가 제조 일자가 쓰인 전구처럼 동시에 빛나고 동시에 꺼지길 바랐다.

저수지에 가서 호리병을 거꾸로 들고 바닥을 두드렸지만, 아무것도 나오지 않았다. 깨뜨려보려고 주먹을 쥐었을 때, 어디선가 엄마를 찾는 아이의 목소리가 들렸고 나는 호리병을 그대로 버려둔 채 바깥으로 달려갔다.

도망친 곳에는 메시지가 있었다. 그가 폐기되면서 마지막으로 남긴 것이었다. 내가 가짜였더라도 당신은 적당히 건강하게 지내요. 이따금 사람들과 핑퐁을 치기도 하고. 오래된 불안과 결핍은 나를 더 아쉽게 할 테니까요. 당신의 이마는 부드러웠어요.

나는 그가 닫아준 몇 줄의 감상과 조용한 꿈들을 기억하려고 했다.

 

<서울신문 시조 당선작>


달을 밀고 가는 휠체어 / 박락균



물비늘 일으킬 때 주저앉는 여름밤

내려온 눈썹달이 당신 뒤를 밀어주면

휠체어 해안선 따라 바퀴가 걸어간다

당신의 마디마디 달의 입김 스며들어

번갈아 끌어주는 밀물과 썰물 사이

눈동자 물결에 멈춰 어둠을 다독인다

바닷가에서 태어나 뭍에서 사는 동안

파도만큼 출렁여 눈 뜨고 산 새벽시장

발자국 병상에 누워 허공을 걷는 어머니

 

<세계일보 시 당선작>


예의 / 최경민



옆자리가 그랬다
살아있으면 유기동물 구조협회구요
죽어있으면 청소업체예요

나도 알고 있다
지금 나가면
누울 자리를 뺏긴다는 걸

그래도 가야 한다
새벽에 하는 연민을
이해하지 못하면서

반대편은 견딜 수 없을 만큼 불쌍했다고 말했다

불행히도 고양이는
새벽에 일어난 우리들보다
조금 더 불쌍하다

그래도
다 보고 올까요
죽어있는 것도
살아있는 것도

우리는 그러기로 했다
관할구역 끝까지 갔다
사실은 좋아하지 않는 걸 하는 게
기본 예의가 아닐까
생각하면서

 

<동아일보 시 당선작>

사력 / 장희수



할머니가 없는
할머니 집에선

손에서 놓친 휴지가 바닥을 돌돌 굴렀다

무언가 멀어져가는 모습은
이렇게 생겼다는 듯

소금밭처럼 하얗게 펼쳐지고

어떤 마음은 짠맛을 욱여가며 삼키는 일 같았다 그중 가장 영양가 없는
포기하고 싶은 마음일 것이라 생각해본 적 있다

포기하고 싶을 때마다
포기할 수 있었다면

또다시 포기하고 싶은 마음 같은 건, 생길 리 없을 테니까

할머닏도 이제야 뭔들
관두는 법을 배운 거겠지

다 풀린 휴지를 주섬주섬 되감아보면 휴지 한 칸도 아껴 쓰라던 목소리가
귓등에서 자꾸만 쏟아지는 것 같았는데

쏟아지면 쏟아지는 것들을 줍느라
자주 허리가 굽던 사람의 말은

더 돌아오지 않는 거지

죽을힘을 다해본다 해도

사람들은
영정 앞으로 다가와
국화꽃을 떨어트리고 멀어져 간다

정갈하고 하얗게 펼쳐지는
꽃밭처럼,

무언가 떠나는 모습은 이렇게 생겼다는 듯

할머니 있었던
할머니의 집에서는

 

<동아일보 시조 당선작>

절연 / 류한월



불꽃이 튄 자리엔 그을음이 남아 있고
뭉쳐진 전선 끝은 서로 등을 돌린 채로
흐르던 전류마저도 구부러져 잠들었다

구리 선을 품에 안은 검은색 피복처럼
한 겹 두 겹 둘러싸는 새까만 침묵으로
철로 된 마음속에서 절연되는 가족들

한 번의 접점으로 미세 전류 흐르는데
묻어둔 절연층엔 전하지 못한 말들이
심장의 전압 내리고 가닿는 길 찾으려

 

<현대경제신문 시 대상 당선작>

파밭 / 엄경순


하얀 다리를 걷어 올린 푸른 대궁

채마밭 굵은 파들이 쑥쑥 자란다

대궁 안은 한 숨 두 숨 잔뜩 부풀었는데

속내를 알 수 없는 통통한 옆구리를

청개구리 한 마리가 발가락으로 간질인다

세상을 머금은 듯 단단히 여민 대궁

아무리 흔들어도 속을 보여주지 않는다

꺾지 않으면 속을 들여다볼 수가 없다

속을 보려고 대궁을 꺾을 수도 없다

대궁 안에 들어 있는 작은 세상

가만히 숨죽여 귀 기울이면

아무리 생각해도 도통 답을 찾을 수 없는 일들이

끙끙 속을 태우며 들어앉았다가

말문이 터지듯 어느새 쑤욱 답을 밀고 올라와

파바밭! 꽃대 위에서 하얀 꽃망울로 터진다

파밭에서는 꽃이 필 때마다

나비랑 벌 무리 좋아라 야단법석이다

대궁은 여전히 무슨 궁리 그리 깊은지

하얀 꽃 속 까만 씨알이 응어리처럼 영근다

세상에는 얼마나 많은 비밀이 있던가

작은 세상이 일일이 영그는 이치를 다 알 수는 없지만

백제의 향로 같은 깊은 침묵이 피워 올린 꽃대는

푸른 속내를 감추며 더욱 단단해져가고

꽃씨는 벌써부터 파 밭 파 밭 아우성인데

나는 생각이 여무는 그 침묵이 좋아라

발뒤꿈치 들고 조용조용 서 있는 파뿌리들


 

<현대경제신문 시 우수상 수상작>


새벽배송 공작소 / 김선욱



잠든 사람이 더 많을 열두 시 반

작고 노란 봉고차에 이형화물처럼 올라타서

접이식 의자를 펼치고 졸음과 함께 앉아서

로켓도 쏘아 올릴듯한 기지에 도착해서

거대와 명령과 굉음에 쪼그라들어서

너도 나도 그냥 입고 온 대로 입고서

무심한 컨테이너벨트 앞에 서서

잘못 건드린 도미노처럼

쏟아지는 토트박스 토트박스 토트박스

왼손은 청기 오른손은 백기

청기 백기 함께 올려

청기 백기 함께 내려

반복하다가 가끔

청기가 어딘가에 끼어서

박스와 박스사이라거나 선반의 틈,

깜빡하고 가져와버린 마음에도 끼어서

십오 분의 쉬는 시간에

끼었던 손을 빤히 바라보는 것

내가 나한테 이래도 될까?

하고 물어보는 것, 그때

여러분은 이곳에 돈 벌러 온 것 이라며

줄줄 새는 욕으로 우리를 부리는 사람이 있다

모두가 토를 달지 않고 묵묵하게

청기백기 청기백기를 반복하는 것으로

능숙한 백기를 든다

집에 있거나 있었던 사람들을 생각하며

너무 큰 옷을 입은 물품들이

롤테이너에 실려 도크 밖으로 빠져나갈 때마다

새벽이 닳아간다

병렬로 놓인 무수한 트럭 틈 사이로 햇빛이 스며든다

혹시 꼭 안가셔도 되는 분 있습니까

조금 더 일하실 수 있는 분 있습니까

힘 빠진 청백기 대여섯 개가 죄처럼 들려지고

나는 옆 사람 얼굴을 쳐다보고

그 사람도 내 얼굴을 빤히 바라본다

우리가 우리한테 이래도 될까?

 

<전북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작>


카카리키 앵무 / 이주경




조용히 우는 아이를 창살에 가둔다 주전자 물 끓는 소리보다 작게 울어도 가둔다 미풍에 머리카락 날리는 소리보다 작게 울어도 가둔다 창문보다 낮게 목소리를 죽이는 아이, 이웃집엔 중문도 방음벽도 없단다 얌전히 울면 해바라기 씨를 가득 줄 테야

호기심 많은 아이를 창살에 가둔다 탁자 위에 놓인 꽃병을 쪼아대도 가둔다 짧고 단단한 부리로 백합 꽃잎을 쪼아대도 가둔다 동글동글한 눈빛으로 수도꼭지를 툭툭 건드려도 가둔다 집안에서 제일 예민한 각도로 웅크리는 아이, 이웃집엔 꽃병도 수도꼭지도 없단다 너의 호기심을 잠그면 해바라기 밭을 줄 테야

혼자 놀기 좋아하는 아이를 창살에 가둔다 오후 햇살이 올리브색 깃털 위로 미끄러져도 가둔다 건반 위를 콩콩 뛰어다니기만 해도 가둔다 깨지지 않는 거울을 보고 혼잣말을 해도 가둔다 방안에서 깃털을 고르는 아이, 이웃집엔 햇살도 거울도 없단다 방안 가득 네 꿈을 펼친다면 새장을 통째로 줄 테야

아파트 밖을 나서는 아이를 창살에 가둔다 창문 여는 소리만 들려도 가둔다 놀이터에서 들리는 웃음소리가 높아져도 가둔다 마오리족의 깃털처럼 가벼워지려는 아이를 가둔다 창살 안에서 노란 깃털을 뽐내는 아이, 이웃집엔 너 같은 아이도 악보도 없단다 내 앞에서만 노래하면 새장을 요람처럼 흔들어 줄 테야

 

<경상일보 시 당선작>


백야 / 원수현



창을 하나 갖고 싶다고 말했다
아주 작아서 내 눈에만 보이는 창을

사람들은 으레 그랬듯 그저 스쳐 지나갈 것이고
나는 그 작은 곳에 눈을 대고 밖을 보기로 했어

틈 사이로

가진 것들이 보였다 너무도 많고 때로는 아무것도 없고
많아서 우는 사람들
없어서 우는 사람들
우리 모두는 이렇게 불행함을 하나씩 눈에 넣었지

이곳을 떠나면 행복해질 거라는 사람들
그들은 지금 어디에?

빙하를 뚫고 도달한 곳이 빙하라니요!
그곳도 돌았다 빙글빙글 꼭짓점도 결국에는

그대는 미치어 있는가
그대는 미쳐 있던가

아 다르고 어 달라서 우리 마음먹기에 달렸다고
아프리카의 한 부족은 뱀을 피해 장대에 올라간다고 했다
점점 더 길어지는 그림자들

우리의 그림자가 세상을 덮을 때

내가 사랑하는 것들을 놓치고 싶지 않아,

깨진 창문을 다시 기우는 사람이 있었다

 

<경상일보 시조 당선작>

인사이더 식사법 / 오향숙



푸성귀 같은 날들 집으로 가져와서
큰 그릇에 버무리면 사람이 모여든다
내 편과 네 편의 입맛 한때는 겉돌아도

속속들이 배어든 유연한 참기름 말
제 각각 살아있는 뿌리의 속마음은
밖으로 내뱉지 않아 싸울수록 순해진다

싱거운 나의 하루 쓴맛이 녹아들어
혀가 만든 비법 하나 스며든 인사이더
싱싱한 유일한 재료 입 닫고 귀를 연다

 

<경상일보 동시 당선작>

단짝 / 유춘상



해가 지면 너는 밝아진다

안심가로등
네 아래로 다가가면
나는 줄어드네

가까이 다가갈수록 내 몸이 차츰차츰 작아지는 걸
넌 높고, 난 네 그림자니까

네 키가 클수록 내 몸은
땅바닥에 딱 붙어 쪼그라지지

우린 친구일까?

네가 서 있고 내가 멀어져 보면
나는 또 약해지네
희미해지네

멀어져서 옅어지는 나

괜찮아,

한번 불러준다면

네가 급할 때 날 부르면 난 곧 딴딴한 근육질로,
내가 화나면 큰일 날 걸(영화 ‘헐크’의 대사 중에서), 하며 헐레벌떡
도우러 갈 테니까

항상 지켜보고 있는 우리가 곧 단짝이지

서로 지켜주자고, 친구

 

<매일신문 시 당선작>

폭설 밴드 / 노은



팝콘은 함성이라서 우리는 스네어 드럼을 밟는다
산과 하늘의 경계가 흐려지는 시간이 오면
저 멀리서 늑대의 우두머리가 하울링하는 소리가 들렸다
교실 안 아이들의 핸드폰에 폭설 경보음이 울리고
뒤적거리다 발견한 서랍 속에서 눅눅해진 팝콘
밴드 합주실은 꼭대기 층에 있어서
아이들은 지붕 없는 교실에서 자습을 했다
쿵, 쿵
우리는 무언가를 떨어뜨리기도 하였는데
무언가와 바닥이 부딪히는 소리는 생각보다 커서
옥상에서 어떤 아이가 얻어터진다는 소문이 학교에 돌았다
누군가 죽은 게 아니어서 다행이라고
너는 그렇게 말할 것 같았다
퓨즈가 나가고 모두 조용해지는 한 순간
기억 속의 학교는 영원히 어두울 것만 같아,
내가 말했다
셀 때마다 달라지는 계단의 수
잡히는 대로 꽉 쥘 수밖에 없어서
손을 쥐었다 펴기를 반복했다
하얗게 질린 손에 온기가 돌아오길 바라며
우린 완전히 고립된 거야
둘 중 누군가 그렇게 말하기도 했던 것 같기도 하고
열차가 운행하지 않고 교문이 눈에 묻혀도
이곳은 폭설 밴드
너와 나는 깨진 전구와 베이스 기타 줄을 들고
학교를 한 바퀴 돌았다
신발장을 지날 때마다 교실에서 이탈한 아이들은 배로 늘어나서
일렬로 늘어선 줄
끝이 보이지 않았다
오지 않는 담임 선생님께,
추워서 옷을 벗었어요 우린 아직 힘이 넘치고 유순하답니다 서로의 입에 팝콘을 넣어주곤 겨드랑이에도 손을 넣어요,
구두 소리가 마룻바닥을 두드리면 학교는 움직입니다 교시음은 필요 없어요 베이스도요
너는 머리말을 이렇게 장식하기로 마음먹었고
늑대들이 산 아래로 내려오고 있었다
아이들이 울기 시작했다

 
<매일신문 동시 당선작>
​​

아브라카다브라 / 최고요

​​
오늘 밤에도 엄마는 자꾸
베개 밑에 달을 숨겨
난 지금 눈을 감고 있어
그래서 더 잘 보여
엄마가 지금 얼마나 무서운지 알아
새까만 밤이 방안으로 몰려왔기 때문만은 아니야
지금 엄마에겐 엄마가 없거든
아브라카다브라 아브라카다브라
마침내 엄마가 주문을 외기 시작하고
할머니의 덧신은 할머니가 없는 할머니 방으로 들어가
할머니를 기다려
나는 꼼짝도 않고 누워서 엄마를 응원하지
베개 밑에 숨겨진 달이 점점 부풀어 올라
지붕을 뚫고 솟아오르도록
아브라카다브라 아브라카다브라
엄마는 일 년이 넘도록 병원에 누워있는
엄마가 하루 빨리 집으로 날아올 수 있도록
주문을 외는 중이야



*아브라카다브라: 서양에서 마술을 할 때 주문의 용도로 쓰는 말. 의미는 '말한 대로 이루어지리다.'

 
<매일신문 시조 당선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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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화상의 오후 / 김정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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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칸 생의 여백이 귓불을 뜯게 했나
느닷없는 살 조각을 붕대로 친친 메고
회색빛 푸른 눈동자 거울 앞에 앉았다
아직 남은 소음에 대해 눈빛이 묻고 있다
오후 내 낯선 색채를 캔버스에 게워내며
진녹색 코트 여미고 파이프를 문 사내
색을 고르는 일은 칼날을 세우는 일
울분 한 붓 슬픔 한 붓 거칠게 찍어 눌러
죽어도 들키기 싫은 고독을 덧칠한다
 
<경남신문 시 당선작>
​​

날개 / 박봉철


날개에 바닥이 있다. 어둠을 안고 일어선 곳에 깃털 냄새가 났다
어깨 둘둘 말며 방향을 잡아간다
바람은 심장을 꿰뚫듯 그림자를 비켜선다
새를 연상하며 새의 가벼운 뼈들을 통과한다
무게를 줄이는 새에게 구멍이 뚫려있다는
고고학적인 소견이 귓등을 강타한다

생각을 횃대 삼아 이렇게 가벼운 분위기는 처음이야,
상황만 점점 무거워지는 거지
무게를 덜기 위해
기낭이 풍선처럼 부푸는 듯 위를 갈아먹었던 게지
거품처럼 붉은 강물들이 몸속 번갈아 우거진 체액을 삼켰던 게지

가쁜 숨이 펼쳐진 입김들이 타원형처럼 포개졌고
빛의 멱살을 찾아 길을 낼 수 있을까
방향을 재면서 동시에 꼬리가 돋아났다
그때 주저앉는 평형의 몫은 없을 것이다

꼬리를 빙빙 돌려보내는 하마, 위험할 때 철썩, 철썩 보내는 비버, 방향을 틀 때
긴꼬리로 균형을 잡는 치타,
꼬리가 날개로 들.어.간.다. 거꾸로 들.어.간.다.
꼬리의 배후는 날개였을까
분주하게 묻어온, 허공을 짚어낸다
날개를 치켜들며 여긴 바닥이므로, 일어섰을 즈음

날것의 대의를 위하여
출렁이는 지평선 너머
반쯤 넘어진 표면으로 뿔뿔이 내미는 깃털

겨드랑이에 혁명을 물고 허공을 헹구던 어깻짓
기슭을 앓아, 바깥의 몸살이다




 
<경남신문 시조 당선작>

​​

날개 / 최태식


소원 판매점에는 기도값이 각각이다
산중턱에 자리한 바람이 줄을 설 때
양초는 제 몸에 쓰인 문구에 집중한다

절박한 크기마다 생각이 많아져서
정갈하게 모셔 놓아 소원이 즐비한 집
기도발 소문에 끌려 사람들 모여든다

몸 낮춘 자리마다 촛불은 뜨거워져
쉽게 살 수 없는 꿈 저마다 간절한데
묵중한 내일 앞에서 오늘은 빈 몸이다





<영남일보 시 당선작>




침목 / 김미정





스위스 빙하 열차의 기울어진 유리잔을 생각했다

버틸 수 있는 각도, 그런 거 있잖아


결빙 구간이 자주 반복되었다

나는 선로를 따라 쩍쩍 갈라지고


아무렇지 않다는 말이 물이 되어 몸이 몸으로 늘어지고

완전히 누우면 각진 하늘이, 조금 측면으로 기울이면 삐죽이

솟아있는 아파트 옥상과 낙상주의가 적힌 사물함이 보였다


신은 나를 물속에 둔 채로 자주 자리를 비웠다

그럴 때마다

몸을 최대한 동그랗게 말고 그 속에 얼굴을 파묻었는데


나랑 같이 있자

사이프러스 큰 나무들은 비켜서 있다

철 지난 비둘기를 부르고 솟대를 걸고 손톱을 물어뜯고,

보고 싶다 보고 싶다 열두 번 모으면 사랑해 한번


커튼이 열리면 각자의 성호를 긋고 밥상을 마주하는 사람들

비릿한 철 냄새와 밥 냄새가 섞이고


열차는 제시간에 들어오거나 연착되었다

내 자리는 콘크리트가 대신하고, 폐목이 되어 공원으로

옮겨질 거라는데


부유하는 법을 배운 건 그때부터

신은 나를 통과하게 될 것이다


기다림은 다시 기다림으로 연결된다


누구든 꾹꾹 밟고 지나가길

그렇게 홀가분해지도록 나를 분리하기 시작한다




 


<문화일보 시 당선작>


<구인> 광명기업 / 김용희



외국인 친구를 사귀려면 여기로 와요 압둘, 쿤, 표씨투 친해지면 각자의 신에게 기도해줄 거예요 한

국인보다 외국인이 더 많은 글로벌 회사랍니다 요즘은 각자도생이라지만 도는 멀고 생은 가까운

이곳에서 점심식사를 함께해요 매운맛 짠맛 단맛 모두 준비되어 있어요 성실한 태양 아래 정직한

땀을 흘려봐요 투자에 실패해 실성한 사람 하나쯤 알고 있지 않나요? 압둘, 땀 흘리고 먹는 점심은

맛있지? 압둘이 얘기합니다 땀을 많이 흘리면 입맛이 없어요 농담도 잘하는 외국인 친구를 사귀어

봐요 쿤과 표씨투가 싱긋 웃습니다



서서히

표정을 잃게 되어도 주머니가

빵 빵 해질 거예요 배부를 거예요


소속이란 등껍질을 가져봐요 노동자란 명찰을 달아주고 하루의 휴일을 선물해 드릴게요 혼자 쌓

고 혼자 무너뜨리는 계획에 지쳤나요 자꾸 삐걱대는 녹슨 곳이 발견되나요 이곳에서 기름칠을 하

고 헐거운 곳을 조여보아요 감출 수 없는 등의 표정을 작업복으로 덮어 봐요 작업복을 입으면

대수롭지 않고 털썩 주저앉아도 괜찮다는 생각이 들 거예요 툭툭 털고 일어나는 털털함을 배워보

세요 먼지 풀 풀 날리는 공장이지만 한 뼘씩 자라는 미래를 그려봅시다 동그란 베어링을 만들다 보

면 자꾸 가게 될 겁니다 긍정 쪽으로



밝은 빛이 이곳에 있습니다 일종의 상징이지요 바람이지요 떠오르는 해를 보며 출근길에 몸을 실

어보세요 터널을 좋아하나요 터널이 좋아지게 될 거예요 끝엔 항상 빛이 있다는 사실로

어둠에 갇혔나요

이곳의 문은 활짝 열려 있습니다



분류 : (중소기업) 제조업 - 선박 부품 제작

임금 : 최저시급, 일 8시간(잔업 1시간), 격주 토요일 근무



깔 깔 깔



쿤이 땀 흘리며

너트를 조이는 래칫 렌치를

이곳 사람들은 깔깔이라 부릅니다



웃음 많은

이곳으로 와요


 
 
<전북도민일보 시 당선작>




소가 라디오를 먹는다 / 임수율

​​
라디오를 켜놓고 소머리를 감긴다

단단한 이빨 속에 곱씹은 풀들이

이끼가 되었다



부릅뜬 눈으로 저녁 너머를 되새김하는,

머리만 남은 소가 싱크대에 식은 울음을 쏟고,



두꺼운 혀와 솟아오른 귀를 씻기다가 나는,

한 줄기 바람이 되기도 하고



익을수록 쫑긋해지는 귀에서 흘러나오는

천둥소리, 풀벌레 소리, 빗방울 떨어지는 소리,

우우 끓는 한낮



뽀얗게 우러난 사태를 국자로 휘휘 젓는다



씹을 때마다 혓바닥이 입천장에 붙어 쩝쩝거리는

국밥 속에서 흰 눈 밟는 소리도 들은 것 같아,

발 담근 소의 냇물과 옥수수, 질경이, 개망초와

억새를 꾸역꾸역 건져 먹는다



소 울음소리에 주파수 맞추면,

라디오는 소와 놀던 풀밭의 새들과

꽃잎 열리는 소리를 쏟아놓고




 
<광주일보 시 당선작>

​​
생각하는 나무 / 이 문 희






나는 몽상가답게 낙천적이죠

구름모자를 즐겨 써요

서서 먹고 서서 자는 동안에도 반짝반짝 사색을 즐기죠

이파리가 많다는 건 생각이 많다는 증거랍니다

그래서 외롭지도 외로운 줄도 모르죠

빽빽한 생각에 몰두하다 보면 궁금한 게 참 많아요

덩굴장미는 용암의 뿌리에서 분출한 식물성 화산일까

바다가 파도 창고라면 하늘은 구름 공장일까

누가 저 많은 구름들을 져 날랐을까

매미에게는 몇 마력 울음의 엔진이 장착된 걸까

또 이런 생각도 해요

하늘에 갇힌 별들은 자유로울까

물고기는 어디를 날아가려 지느러미를 가진 걸까

무지개는 하늘 놀이터의 미끄럼틀일까 아니면 하늘 바깥으로 나가는 통로일까

나는 새들에게 의자를 내어주는 게 취미라면 취미

노래를 하고 싶거나

한바탕 춤을 추고 싶을 땐 바람 몰이꾼이 되어요

매일매일 석양을 바라보며

서쪽이라는 당신에게 시를 지어 주죠

누구나 나의 친구가 될 수 있지만

길거리에서 배낭 메고 여행 중인 달팽이를 만났다고 해서

버스정류장에 데려다주겠다는 생각은 꺼주세요

오늘도 생각의 평수를 넓혀가는 나는 자유인이니까요

낮달에게 안개에게 늘 새로운 말을 걸어요

걷느라 생각에 물든 당신이라면

그늘에 잠깐 쉬어 가셔도 됩니다

나는 생각의 씨앗을 다 모아 땅에 뿌리려고 해요

파랗게 돋아나는 생각들을 환호하며 매만지게 될 거예요

나는 파란 마을 파란 집에 살아요
 
<무등일보 시 당선작>



화산리 보물선 / 이수하



그가 어떤 파랑도 타고 넘는 보물선을 만든다
담벼락 밖으로 삐져나온 보일러 연통은 좌표
개나리 꽃가지는 방위를 살피는 나침반이다
턱선의 땀방울을 향해 양어깨가 번갈아 오가며
오후를 스패너로 조인다
기름통을 싣고 와 기계실에 연결했으니
골목에서 얻은 메트리스를 선실 바닥으로 삼고
커튼은 돛으로 쓴다
눈썹에 와닿는 입김
문턱에 가는 실금 따라 살얼음이 생긴다
아귀가 맞지 않는 곳에서 갈매기 울음이 새어 나온다
유모차는 뭐 하려고?
엄마를 밀고 가려고
부러진 선풍기는 내놓아야지
거기 푸드덕 새가 살아
의자는 도로 갖다 놔 애들도 올 텐데
발 뻗을 곳이 없잖아
그는 제 식구 찾아가겠다고
삐걱대는 의자를 타고 헌 옷가지들 챙긴다
의자 다리가 구부러진 못을 물고 기우뚱거린다
아귀가 맞지 않는 곳에서 갈매기 울음이 새어 나온다
유모차는 뭐 하려고?
엄마를 밀고 가려고
부러진 선풍기는 내놓아야지
거기 푸드덕 새가 살아
의자는 도로 갖다 놔 애들도 올 텐데
발 뻗을 곳이 없잖아
그는 제 식구 찾아가겠다고
삐걱대는 의자를 타고 헌 옷가지들 챙긴다
의자 다리가 구부러진 못을 물고 기우뚱거린다
잠가도 들리는 물 흐르는 소리
쇠 파이프의 긴 그림자가 기울어지는 들보를 받쳐 든다
나무 벌레 구멍 속에서 금가루 같은 햇볕 쏟아내면
갯벼룩이 기어 나온다
벼락바람이 불고
얼룩무늬 골목이 스멀스멀 방문을 밀쳐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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