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쓰기 공부방
성탄 전야 / 곽재구
귀촌일기 박뫼사랑
2024. 12. 24. 12:58
성탄 전야 / 곽재구
소년이 눈보라 속을 걷는다
숲속의 작은 통나무집
눈 쌓인 밤은 푸르다
소년이 통나무집 안으로 들어선다
성냥을 그어 램프에 불을 붙인다
창틀 앞에 아주 작은 눈사람이 엎드려 있다
소년이 눈사람에게 다가가 꼬옥 안아준다
사흘 내내 기다렸니?
이런 아무것도 안 먹었구나
소년이 눈사람에게 한 스푼 물을 먹인다
눈사람의 몸이 천천히 움직이는 것 같다
소년이 눈사람을 안아 식탁 위로 옮긴다
성냥을 그어 벽난로에 불을 붙인다
벽난로에서 밀감 빛 크리스마스캐럴이 쏟아져나온다
소년이 턱을 괴고 눈사람을 바라보는 동안
눈사람은 조금씩 녹아 고슴도치가 된다
고슴도치도 턱을 괴고 소년을 본다
이번에 도시로 간 일 잘되었단다
이제 혼자 남겨두고 가지 않을게
창밖에 눈보라가 날리고
밤은 성 마태수난곡처럼 푸르다
[곽재구 '꽃으로 엮은 방패' 창비 20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