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하고 있는 중 / 조경숙
변하고 있는 중 / 조경숙
신비한 어둠입니다. 오랜만의 깊은 잠 덕분인지 까맣고 차분한 공간에 다리를 뻗고 편안하게 떠 있는 기분입니다.
자신을 들여다보기에 딱맞는 환경입니다. 새벽 차가운 공기를 깊게 들이마시니 머리가 맑아집니다.
잠을 못 잘가봐 멀리한 커피를 커다란 머그잔에 마련합니다. 커피도 나이들면서 온 불면증으로 피하고 있을 뿐 기실 잠을 방해하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잠시 요사채의 스님처럼 면벽합니다. 잊고 있으나 가슴 밑에 가라앉아 있던 미망들이 멍때리는 동안 슬그머니 빠져나가는 느낌입니다. 조용하고 잠잠한 시간, 이 시간을 사랑합니다. 자리를 고쳐앉고 변하고 있는 중인지 나에게 묻습니다. 연초에 봄이 오기 전까지 일부러라도 자신을 위한 생활패턴을 만들어보자고 하였습니다. 생각에서 행동으로 돌아서자고요. 보통의 삶을 의식하고, 자신만의 취향을 찾아 즐길 것, 누군가와 함께할 것, 말입니다. 그러려면 미식가처럼 맛있는 것을 찾아내고 자연을 즐기는 여행을 탐하며 마음에 맞는 이를 찾아 먼저 손을 내밀고 수다스러워지자고 다짐하였습니다. 남편을 잃은 외로움에서 오는 아픔을 적극적으로 피하자는 것이지요. 마주하는 사람들이 많이 밝아졌다고 하지만 내 속살도 우윳빛으로 되살아나고 있는지. '되살아나고'라는 단어에서 움찔합니다. 본래의 모습이 있기나 하였는지요. 어제 낮에 있었던 일상도 가물가물합니다. 기억하는 기능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으니 내가 나를 궁금해하는 요즘입니다. 메모장을 펼쳐보며 생각을 모읍니다. 며칠 전 광명시에 있는 기형도문학관을 다녀온 기억이 납니다. 바람이 불고 미세먼지가 안개같이 드리운 날이었습니다. 조그만한 책자를 뚝딱 만들어 가지고 온 선배 작가께 고마워하며 오랜만에 고속도로를 달렸습니다. 짧은 여행은 즐거웠고 새내기 문인들과 자신의 글을 낭독하는 시간을 가지니 보람이 있었습니다. 기형도는 연평도 바다 가까이에서 태어나 시흥에서 가난하게 머물다 30세에 세상을 떠났더군요. 글과 그림, 예술에 남다른 소질을 갖춘 분이 연세대 정치외교학과를 다녔다는 것이 의아했습니다. 그 시대는 작가들이 밥 먹기 힘든 세태였으니 그랬으리라고 추측합니다.어쨌거나 가난은 물러가지 않았습니다. 안양천의 공장 글뚝 연기를 보고 시 <안개>가 탄생된 것이라고 말하니깐요. 사랑하는 누나가 불의의 사고로 죽고 어두운 글이 쏟아진 것도 감히 이해합니다. 저 또한 혼자된 후 무겁고 우울한 글이 많아졌으니깐요. 그의 시 <길 위에서 중얼거리다>의 첫 구절에 '그는 어디로 갔을까'에서 숨이 막혔습니다. 죽으면 어디로 가 있는 걸까요? 그저 세월이 흐르고 서로 얼굴을 보지 못하고 같이 지낸 날들이 먼지처럼 흩어져 사라지면 끝나는 건지요? 떠나온 길은 돌아가면 되는데, 살아 있기만 하면 말입니다. 아니라면 다음 세상을 희망합니다. 평행세계 어디쯤에서 가신 이들이 기다리고 있으니 삶을 성실하게 이행하면 만날 수 있는 포상이 주어지리라고 생각하고 싶습니다. 설마 가슴 아픈 많은 자국을 세상에 남겨 놓고 찾아오는 이들의 심금을 울리면서 이 모든 것이 아무 가치가 없다는 것이 아니겠지요. 남겨진 이들은 사연을 기억하고 의미를 부여하며 충실하게 살아가려 합니다. 나도 문학관의 작은 공간에서 써온 수필 한 편을 낭독하며 존재의 의미를 남겼습니다. 슬픈 나날이 잊힌 듯 천연스럽게 말입니다. 나는 늦깍이인가 봅니다. 어른이 지나 어르신이 되어서야 시간이 약이라는 말을 실감하니까요. 짝을 잃은 고통은 긴 세월이 지나야 거친 숨이 잦아들고 사람들 속에서 견뎌야 아무는 자리가 마련된다는 것을요. 이별의 슬픔은 견디는 것만이 능사가 아니라는 것도 알았습니다. 피폐한 삶속에서 요절한 시인도 있는데 하물며 남편과 40여 년을 같이 하였으면서 나만의 족쇄처럼 오랫동안 칭얼거리며 사다는 것은 볼썽사납다고 돌아오는 길에 헛웃음을 지었습니다. 언제 또 변덕을 부려 나만의 통증이라고 엄살을 부릴지 모르겠지만, 지금은 그렇습니다. 방금 고요가 후퇴합니다. 밖에 차가 급하게 떠나는 소리, 혼자 앓고 있는 시간을 치유하듯 '붕'하고 음파가 떠오르다가 사라집니다. 시계는 다섯 시를 지나고 있습니다. 다시 평화... 자신을 응시할 수 있는 시간, 혼자 있음이 위안이 됩니다. 밖을 내다봅니다. 건너편 아파트의 불이 하나 둘 밝혀져 있습니다. 외출을 생각합니다. 문학관 방문처럼 의미 있는 일이면 최상이지만 아니어도 나쁘지 않습니다. 오늘도 미세먼지가 만만치 않아 보이고 코로나는 극성이라고 하지만, 상관없습니다. 나는 변하는 중입니다. 이 땅에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마주 보고 사랑하고 확신하고 소망하며 살아갈까요? 나는 누구보다 더 많이 떠들고 웃고 희망하며 열렬히 달려갈 겁니다. 그 속에서 미숙하여 다시 떠돈다해도 괜찮습니다. 아침이 열리고 있습니다. 봄여름가을겨울의 노래 <오롭지만 혼자 걸을 수 있어>를 들으며 브로컬리 양배추 당근을 찜기에 올려놓습니다.
출처 더 수필 [변하고 있는 중 - 조경숙]
이 수필은 조경숙 작가가 자신의 삶과 감정을 돌아보며 변화해가는 과정을 섬세하게 기록한 글입니다. 특히 상실과 고독을 통해 스스로를 들여다보며 새로운 다짐과 희망을 찾아가는 모습이 인상적입니다. 글 곳곳에 내면의 고요함과 문학적 성찰이 어우러져 잔잔한 감동을 줍니다.
- 어둠과 고요의 의미: 새벽의 고요한 시간에 작가는 자신을 되돌아보며 내면을 정리합니다. 이는 치유의 시간이자 자신과 대화하는 소중한 순간으로 묘사됩니다.
- 상실과 회복: 남편을 잃은 슬픔을 겪으면서도, 그 고통을 극복하려는 노력이 돋보입니다. "시간이 약"이라는 말의 진정한 의미를 깨달으며, 삶 속에서 작은 기쁨을 찾아갑니다.
- 문학과 기형도: 기형도 문학관을 방문하며 시인의 삶과 작품에 공감하고, 그 속에서 자신의 상실감과 글쓰기의 의미를 연결합니다. 시 <길 위에서 중얼거리다>를 통해 죽음과 삶의 의미를 고민하는 작가의 깊은 성찰이 드러납니다.
- 변화와 다짐: 글의 마지막에서 작가는 변하고 있음을 스스로에게 인정합니다. 미숙하더라도 웃고 희망하며 살아가겠다는 다짐은 독자에게도 용기와 위로를 줍니다.
이 글은 누구나 겪을 수 있는 상실과 고독의 시간을 담담하게 풀어내며, 변화하고 성장하는 삶의 모습을 아름답게 그려냅니다. 문학을 사랑하고 스스로를 되돌아보는 이들에게 깊은 울림을 주는 글입니다.
혹시 이 수필을 더 깊이 해석하거나 다른 관점에서 분석해볼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