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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련이 피기까지 / 유수연

귀촌일기 박뫼사랑 2024. 12. 12. 13:29

수련이 피기까지 / 유수연

 

너한테선 상처를 덮은 밴드 냄새가 난다

 

가렵지만 뜯어보곤 했다 가만히

잠들어 있는 걸 알면서도

그 속에는 작은 점

 

같이 누워 결혼에 대해 얘기하던 홍천의 밤하늘

흰 침대보

잔뜩 어지러운 별자리

긁다보면 모든 게 상처였다

흰 이불

얼굴까지 끌어당기고 무성한 머리칼을 만졌다

잠들어 있는 걸 알면서도

따라잡을 수 없는 얼굴

 

사랑도 담요로 덮으면 무엇이 들었는지 모르겠다

웃는 소리는 아닌데

눈에 든 멍을 하늘을 가져다 가리고 싶었으나

자꾸 손바닥 밖으로 빠져나왔다

 

우리는 어떤 자세에 열중했지만

제대로 성공한 것은 없었다, 이별을

서운한 일이라고 말해줬지 차렷 자세로 누워서 말이야

주머니가 없는 몸이었지만

넣어 갈 수만 있다면

네 마음을 키워 꽃을 피워보고 싶었다

 

손등에도 그게 있네

나랑 같은 오른손에 그게있어

사실 나 죽을 만큼 힘든적 없었다

사실일 것까지 없는데 나도 그런 적 없다

우리는

 

불효에 대해 생각하면

서울이 모두 불에 타도

우리는

주먹 꼭 쥔 채 버틸 것이다, 지독하게

우리는

 

겨울 수감자처럼

서로를 안고 생존하려 했다

그렇지, 사랑보다 고귀한거지

녹일 수는 없어도 죽을 수는 더욱 없으니까

잘 구운 상감청자처럼

내 몸을 초과하는 마음이 너무 많아도

 

우주는 다 계획이 있다

잎 속에 잎이 있듯

 

넘쳐날 건 없을 것이다

 

우리는 수렴할 것이니까

너 없는 지구라도 너 닮은건 너무나 많을 것이고

같이 걸을 길은 자꾸 생겨나겠지

염치없이, 너 없는데도 말이야

 

홍천의 주일

꽉 움켜줜 것은 무엇이든 

손을 펴봐

 

내 점이야, 왼쪽 눈 밑에 다 붙이고 살아

울음이 그친대

 [유수연 '기분은 노크하지 않는다' 창비 2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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