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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의 광장 / 주민현

귀촌일기 박뫼사랑 2024. 6. 12. 13:55

빛의 광장 / 주민현

 

빛들이 서로 대화를 나누는 것 같군그래, 종일 흔들리던 나무 밑에서, 너의 얼굴이 더이상 기억나지 않네. 햇빛 아래선 한때의 절망도 아수라한 것이 되고 기쁨은 모호해져만 가네. 빛에는 신비한 힘이 있지. 어둠을 더 어둡게 만드네. 내 얼굴에도 반쯤 그늘이 졌을 거야. 꿈은 추상의 질료래. 절망은 눈에 안 보이는 줄무늬고. 그렇게 가습기 살균제가, 화재가, 바이러스가 곳곳에 침투했으며 울음과 비명과 화상으로 얼룩진 거리에 햇빛이 들다니 참 이상하지. 공기를, 기분을 완전히 바꾸네. 힘차게 밥을 먹는데, 빛이란 참으로 이상한 목소리와 같지. 우리를 지도에 없는 곳으로 인도하네. 오후란 부드럽게 담소를 나누기 좋은 시간. 그렇게 작은 슬픔을 나누어 갖기에도 좋은 시간 . 햇빛은 얼마나 멀리서부터 오나, 과학자처럼 중얼거릴  때, 중얼중얼거릴 때 너는 너로부터 멀어졌다가 고무줄처럼 가까워진다. 무한정 길어지는 곳에서, 너는 신약 개발에 매진하고 있다지. 다음 이 시간에 ..... 라고 끝나는 연속극처럼 다음이, 또 그다음이 있다고 믿는 자들이 있다니 신기하지. 마네킹의 발이 스르륵 움직였네. 그런 것은 비과학적이며 있을 수 없는 일이라네. 우리 옆으로 유령처럼 마네킹의 미소가 스르륵 스쳐갔네. 상식과 과학을 믿는 너와 함께 도시 걷기. 도시마다 위대한 유적같은 성을 하나씩 지니고있지. 오늘 어리석은 이들끼리 성문을 통과하지. 더 외로운 이들이 문지기가 되고 어떠한 손금도 금방 낡은 지도가 되는 이곳에서 그래도 꿈을 꾸는 사람들이 있다니 이상하지. 이상한 돌림노래를 부르는 이들이 있다는 것이. 빛에는 어떤 신비한 힘이 있다고 믿으며 걸어가는 이들이 있다는 것이.

 [주민현 '멀리 가는 느낌이 좋아' 창비 20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