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쓰기 공부방

그림자에게 / 김정수

귀촌일기 박뫼사랑 2024. 5. 20. 13:27
그림자에게 / 김정수
 

자신의 존재감을 아무렇게 팽개친 채
따라 하기 좋아하는 어둠을 걸친 그대
후련히 혼자 일어설 그런 꿈도 있었겠지

평범한 사이지만 떼려야 뗄 수 없다
비 내린 외등 아래 큰 우산 받쳐주면
모두가 잠든 밤길에 서로 발이 젖었다고
(시조집 ‘하루, 뛰다’, 책만드는집, 2024)

[시의 눈]
그 동안 나는 많은 그림자와 동반해 왔네요. 세월 따라 길 따라 그와 늘 이곳저곳을 기웃거려 왔지요. 유년 때는 사람 ‘따라 하기 좋아하는’ 그와 달리기 시합을 자주 했습니다. 하지만 뭐 번번이 졌지요. 중학생이었을 때, 이웃집 소녀네 창을 넘겨다보기를 즐기기도 했습니다. 그게 호기심 때문만도 아니었습니다. 한데, 담 넘어로 간 석양 녘 긴 그림자 때문에 발각돼 그녀 오빠에게 혼난 일도 있습니다. 어느 날은 하굣길 배가 고픈 나머지 남의 고구마 밭 서리를 하다 농막에 비친 그림자로 인해 들키고 말았더랬지요. 주인 아주머니 신고로, 난 아버지로부터 호된 꾸지람을 들어야 했습니다. 그후 어느덧 난 장년이 됐습니다. 특수학교에 근무할 때 장애 아이들과 함께 자주 운동장에 나가 그림자놀이를 했습니다. 물론 내 ‘그림자’는 늘 아이들에게 밟히었군요. 아니 밟혀 주었더랬지요. 참, 이제 늘그막에 왔군요. 오늘은 비 오는 외등 아래 혼자 고독을 느끼며 앉았습니다. 어느새 나를 따라다니던 그림자는 내 젖은 발을 감싸며 저 위에 ‘우산’처럼 날 받쳐 줍니다. 문득 하느님의 그 우산 위가 궁금해 집니다. 김정수 시인은 울산에서 나 2012년 성파시조백일장 장원, 2013년 ‘화중련’ 신인상, 2014년 국제신문 신춘문예로 등단했고 시조집 ‘거미의 시간’(2017)을 냈습니다. 그는 예사로이 지나는 일상에도 자아의 인연을 묶으며 외솔의 정신을 구현하는 시인입니다.

  <광주매일신문 노창수·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