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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요 강좌/시의 인문학> 조개의 껍질과 속살의 시학

귀촌일기 박뫼사랑 2024. 5. 19. 05:52

<토요 강좌/시의 인문학> 조개의 껍질과 속살의 시학


시는 모든 예술과 문학의 으뜸이라곤 하지만 좋은 시를 쓰기란 쉽지 않다. 지난 10년간 이 강좌를 통하여 시 짓기의 기초를 반복해서 언술했지만, “이것이다”라고 할만한 방법을 얻지 못한 회원들이 많을 것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수준의 높낮이가 다른 불특정 다수의 회원에게 맞는 정답이 있으면 좋으련만, 시 짓기에선 그런 정답은 없다. 다만 이 강좌는 현대시 이론이나 시인들에 의해서 제일 중요한 요소로 언급되는 시 짓기의 기초적 내용을 추출하여 쉽게 전달하려고 할 뿐이다. 사실 시 짓기의 처음과 끝도 시가 되도록 썼느냐, 아니면 넋두리, 또는 시적 사물을 설명하거나 시의 꼴을 갖추지 못한 비시(非詩)냐의 차이다. 그것 말고는 "시를 이렇게 써야 한다"라고 강요한다면 오히려 시의 독창성을 죽이는 일이 된다. 그러므로 시 공부란 시를 이루는 기초공부가 대부분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 기초가 튼튼하면 시를 제대로 쓸 수 있다. 좋은 시를 쓰는 시인의 대부분은 기초가 잘 받쳐주고 있음은 두말 할 필요가 없다.

시 쓰기를 특별히 잘 가르치는 사람도 있지만, 그런 사람을 찾아 헤매는 사람치고 제대로 된 시인을 별로 보지 못했다. 시는 머리로 쓰는 장르가 아니기 때문이다. 시의 기초만 제대로 알아도 자꾸 써보면 시가 자꾸 좋아진다. 그러나 자기 시에 도취되어 자기의 수준이 어느 정도인지를 모르는 사람도 많다. 현대시의 흐름을 모르고 옛날식으로 쓴 진부한 내용이거나 진취성이 없어서 발전하지 못하는 경우다. 이런 사람들은 대체로 자기 고집을 내려놓지 못하기 때문이다. 아무리 좋은 시 짓기의 이론을 배워도 건성이거나 "자기 시는 이런 내용의 시다"라고 자꾸 설명하려는 자세다. 시가 점점 좋아지는 사람의 대부분은 자기의 고집을 내려놓고 일단 시 짓기의 기초 방법을 받아들이는 마음이 열려있다. 그러면 죽이 되든 밥이 되든 시가 된다.

시는 설명해서 이해되는 장르가 아니라 독자가 읽고 느끼는 장르다. 좋은 시집을 읽어보는 일은 좋은 시 짓기를 위해 반드시 필요한 일이다. 좋은 시집이란 좋은 시의 조건을 갖춘 시집이다. 여기에서 다시 그것을 확인하기 위해 임보 시인이 주창한 내용을 참고하고 가자.

<좋은 시란?>

1) 소통이 잘 되는 글(공감이 되는 글)
2) 아름다움을 담은 글(시적 미감의 글)
3) 재미가 있는 글
4) 새로움이 담긴 글
5) 감동을 지닌 글
6)그리고 결론으로 좋은 시는 좋은 과일처럼 보기도 좋고 맛도 있고 영양가도 있어야 한다.

내가 항상 강조했던 내용과 동일하다. 위 내용이 시 공부의 전부라고 할 수도 있다.그 외의 이론은 저렇게 시를 쓰기 위한 보조적인 내용이라고 해도 틀린 말이 아니다.

시인은 언어의 요리사다. 좋은 요리사가 되기 위해선 좋은 음식을 많이 먹어보고, 궁합이 잘 맞는 재료가 어떤 것인지를 고르고 연구 한다. 그러나 요리하는 방법을 스스로 터득하려면 시간이 많이 걸린다. 요리를 잘 하는 사람에게서 배우면 방법을 빨리 습득할 수 있다. 시도 마찬가지다. 좋은 스승을 만나면 시가 빨리 좋아진다. 그런데 아무리 좋은 스승이라도 사람인 이상 100%완전할 수 없다. 단점도 있기 마련이다. 좋은 제자는 장점을 보며 따르고, 나쁜 제자는 장점이 열이라도 단점 한두 개만 있어도 배신한다. 그래서 "최고의 시인은 우직한 사람이다"라는 말이 있다. 사람간의 관계를 지속하다보면 갈등이 있을 수 있다. 주변에 사람이 많은 사람의 특징은 그런 갈등도 자기 발전이나 시의 자양분으로 삼아버린다. 그러면서 우직하게 따르고 쉽게 배신을 하진 않는다.

우리가 시를 쓸 때 자꾸 어떤 새로운 이론을 배우려고 할 필요가 없다. 단순하게 생각하고 시를 쓰자. 시 쓰기의 왕도는 없지만 좋은 시는 군소리를 용납하지 말아야 한다. 즉 시 쓰기는 ‘절제와 겸손’이다. 먼저, 하고 싶은 이야기를 모두 써놓고 한 가지 주제만 남기고 객설을 들어내고 낭만적 고뇌를 살려내는 일이 시의 미덕을 살리는 길이다. 이것이 하루아침에 매끄럽게 되지는 않는다. 계속 연습하는 방법밖엔 없다. ‘낭만적 고뇌’를 계속해야 한다. 거친 언어를 배격하고 서정이 묻어나는 언어로 진술하는 형태다. 즉 슬프거나 괴로운 상황이라도 감정을 최대한 억제하여, 마주한 현실을 직설하지 않고 유사한 이야기로 고뇌를 에둘러 애매하게 표현하는 방법이다.

시의 언어가 애매한 것은, 삶을 정확한 논리로 모두 표현할 수 없기 때문이다. ‘애매성’이란 ‘뜻 겹침’을 의미한다. 이 말을 하면서 저 뜻을 숨겨 놓은 형태다. 표면에 드러난 말은 진실의 가면이다. 가면을 진실인 것으로 오해하게 하면 죽은 시가 된다. 껍질은 내용물이 아니기 때문이다. 조개의 껍질이 조개가 아니듯, 껍질을 보여주고 속살을 즐길 수 있도록 쓴 시가 진짜 시다.

좋은 시를 쓰고 싶은 당신, 시 쓰기를 가로막는 나태함이나 자괴감, 알수록 어렵다는 두려움이라는 괴물과 싸워서 이겨야지만 시인이 된다. 의지만 있다면 반드시 이길 수 있는 고통이다.

회원의 디카시 한편 읽기

등극하다

비 오는 날 땡 치고
일없는 날 공치고
근근이 풀칠인데
명퇴도 아닌 허공 신세
깊어지는 호요 바람

_김성이 디카시집「스틸 컷」중에서


위 시에서 시인은 삶에 대한 애환을 탐구하는 방식을 잘 나타내고 있다. 먼저 현상을 보여주고 그 너머의 본질을 환유換喩로 소환한다. 투박한 나무 기둥에 걸려있는 지게를 등장시켜 이 땅에서 어렵게 살아가는 사람들을 호명하고 있다. 일용직 노동자이거나 자기 땅도 제대로 가지지 못한 시골 사람, 또는 비정규직이라도 일을 할 수만 있다면 근근히 살아가련만, 그것조차 제대로 할 수 없는 암담한 현실들에 내몰린 사람을 ‘등극하다’라는 반열에 올려놓았다. 그래서 이 시를 읽는 사람은 그 등극의 쓸쓸함에 가슴이 먹먹해진다. 어쩌면 시인은 아버지를 떠올렸을지도 모른다. 명퇴도 사치인 허공에 붕 뜬 신세, 그런 수많은 사람을 향한 안타까운 시선이자 “우리는 당신을 기억하고 있어요”라는 응원의 메시지다. 그런 목소리가 자꾸 모여야 사회적 공동관심사가 되어서 문제해결을 위한 대책이 나올 수 있다. 시인은 시대의 나팔수이기에 이 시는 그런 의미에서 배경과 언술이 비관적인 것 같지만 체념보다는 극복 의지의 발로임을 드러내고 있다. 폴 발레리Paul Valéry는 그의 시 「해변의 묘지」에는 “바람이 분다. 살아야겠다”라고 했다. 잔잔한 바다 위에 떠 있는 배는 편안한 것 같지만 바람이 불면 당황한다. 그러나 배는 정박이 목적이 아니라 앞으로 나아가서 피안에 당도해야 한다. 바람에 절망하여 주저앉으면 인생의 패배자가 된다. 바람을 잘만 이용하면 배는 더 잘 달릴 수 있다. 바람 불지 않는 인생이 없겠지만, 거스를 수 없는 운명이라면 극복할 수밖에 없다. 금수저로 태어난 인생은 환란이 오면 제일 먼저 녹아내린다. 반대로 흙수저는 환란을 견디는 능력이 훨씬 뛰어나다.

글_이어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