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쓰기 공부방
내가 계속 나일 때 / 신용목
귀촌일기 박뫼사랑
2024. 5. 9. 13:32
내가 계속 나일 때 / 신용목
물이 끓는다
물이
사라지려 하고 있다
물
아닌 것이 되려 하고 있다
물
아닌 것이 되기 전에
사라지기 전에
보리차 티백을 넣는다
베란다 화분에서 사철나무 잎 하나가 뚝 떨어지는 것처럼 눈이 내리고
오래전 봄날, 곰을 잡고 곰의 두개골에 화장을 해 숲으로 돌려보냈는데
그 곰이 하얗게 돌아왔다고
생각하는 내가 있다,
그때까지가 가을이었으니까
창밖 단풍나무 잎은 여태지지도 않고 눈을 받고 있다 하나의 발자국이 다른 발자국의 바닥을 잠시 견뎌주고 있다
아직 떠나지 않은 생각이 잠시 나를 받아주고 있다,
생각하면
몸은 신전처럼 더워지고 예배처럼 슬픔이 모여든다
그때까지가 생각이었으니까
나는 그냥 살았을 뿐이다
나는 계속 나였다
내가 끓었을 때
그가 왔다
그리고 식어가는 시간이었다
[신용목 '누군가가 누군가를 부리면 내가 돌아보았다' 창비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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