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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 김선희

귀촌일기 박뫼사랑 2024. 4. 22. 06:32

결국 / 김선희

 

머리 풀고 흐느끼며 무작정 달려드는
파도가 수도 없이 타 넘고 부딪쳐와
절벽은 몸뚱이 곳곳 검은 멍이 들었다

추억을 보내야만 했던 정동진 겨울 바다
사방이 바람 소리로 눈가를 적실 때
시간은 시든 갈피를 여기에다 뉘었다
(시조집 ‘그늘 없는 은총’, 고요아침, 2024)

[시의 눈]
세월 거슬러 삼십 대의 어느 날이었지요. 정동진 행 기차 안에서 우린 철부지처럼 설레었어요. 파도가 밤바람과 함께 모래톱을 연주할 때 사각대던 발소리가 기억에 선연히도 찍혀 있습니다. 그 밤 우리의 포옹은 이제 한 장 추억으로 남았습니다. ‘곳곳 검은’ 기암들이 내려 보는 아래였던가요. 정동심곡 바다부채길에서 뜻밖에 비를 만났었지요. 층층 괴석 밑 소나기를 피하다 당신은 내게 시선을 오래 거두지 않았더랬습니다. 아니, 기실 바위 풍광을 보다 내게 옮겨온 그 떨리던 참이라 해야겠군요. 아우성치듯 달려든 파도 자락이 눈부시게 흰 당신의 운동화 발을 적시자 ‘어머나!’ 소릴 쳤던가요. 순간, 당신의 기우뚱한 자세를 동시에 부둥키던, 그리고 서로의 눈이 맞춰지고 두 입술은 꽃바퀴처럼 젖어들었지요. 참, 그걸 이제 다 늙은 머리로 소환해서 뭐 어쩌겠어요. 야, 제발 케케묵은 늪에서 빠져나와 딱한 사람! 낡고 퇴색한 앨범 갈피가 하필 오늘 서재 이삿짐을 싸다 발견됩니다. 나는 못 볼 것을 봤다는 듯, 서랍 맨 아래 붉은 눈시울과 함께 묻어버립니다. 결국 난 짐을 다 쌌다는 듯 일어서고 말지요. 밖에선 이삿짐 차가 부르릉 뱃고동소리처럼 재촉합니다.

김선희 시인은 충남 부여에서 나 2001년 ‘시조세계’ 신인상으로 등단해 시조집 ‘토담 조각’(2002), ‘숨은 꽃’(2004), ‘낮은 것이 길이다’(2017) 등을 펴냈습니다. 그는 시적 대상에 그늘 한 점 없이 밝고 투명한 은총을 기구하며 밀밀한 서정을 구현해 내는 시인입니다.

  (광주매일신문 노창수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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