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쓰기 공부방

책 읽어주는 곡비 / 구애영

귀촌일기 박뫼사랑 2024. 4. 8. 06:33

책 읽어주는 곡비 / 구애영

너의 이마 위에 생각을 읽어준다
긴 겨울 지우지 못한 행간의 붓 꽃잎
가지들 잔기침소리
뒤척이는 도돌이표

어깨에서 빛이 노래할 때 갈필을 따라
곁에서 책 읽어주다 또 다른 얼굴이 되어
호명을 기다리는가
떨고 있는 종이 속에서

지켜보지 않으면 어디까지 가버릴지
때때로 까닭 모를 이런 봄날 빗소리 되어
뼛속에 감도는 울음
이 밤 온통 붉다
(시집 ‘종이는 꽃을 피우고’, 고요아침, 2020)

[시의 눈]
가을비는 추적추적 소리의 흔적(秋跡)을 남깁니다만, 봄비는 춘야춘야 속삭이며 책을 읽듯 봄 저녁(春夜)을 덮어줍니다. 추레한 가을비는 옷을 한겹씩 덧대 입히지만, 봄비는 입었던 옷을 한꺼풀 벗어버리게도 합니다. 떠난 옛사랑을 대신한 이 곡비소리는 곧 가벼워질 맨몸이듯 야청을 부르고 초하의 들판까지 이어지겠지요. 그래 지금 그 봄의 호명에 대기하는 중입니다. 그가 바람에 떨며 라일락 향을 묻혀옵니다. 하여 ‘지켜보지 않으면 어디까지’ 데리고 ‘가버릴지’ 모를 빗소리를 따라나섭니다. 참, 그가 내 첫사랑의 혈흔도 위무해 줄까요? 내 밀담의 페이지를 그가 시처럼 읽어주는 밤입니다. 하지만 나의 화답이란 붉힌 눈시울로 멍 때라는 일이 고작이지요. 구애영 시인은 목포에서 나 2014년 서울신문 신춘문예를 거쳐 시집 ‘나의 첫 사과나무에 대한 사과’(2020), 시조집 ‘한밤의 네모상자’(2022)를 펴냈습니다. 그는 사물의 내면을 미세한 기미로 연역해내는 시인이지요.

  <광주매일신문 노창수·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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