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선화가 있는 달력 / 김승희
노란 수선화
노란 프리지어
우리는 3월의 봄꽃을 좋아했지
차가운 대지를 뚫고 총알처럼 올라오는 샛노란 꽃들
냉수 속에 몸을 떠는 노란 새싹들
가난과 고독이 산을 이루는 동안
친구는 홀로 달력 밖으로 길을 나섰네
수선화는 꽃샘바람에 시달리며 피는 꽃
몰려오는 찬 바람을 두 팔로 밀치며 피어나지
영하 50도의 불꽃처럼
-김승희(1952~)
제주에는 수선화가 피었다. 세계가 얼음의 덩어리 속에 갇혀 있는 듯하지만, 꽝꽝 언 땅 위에 검은 빛 돌담 아래에 수선화는 피었다. 눈보라가 벌떼처럼 휘몰아칠 때에도, 빛이 수정(水晶)처럼 밝을 때에도 수선화는 맑고 고요한 자태로 냉기에 휩싸인 이 세계의 아침을 가만히 바라본다. 추사(秋史) 김정희가 제주 유배 시절에 수선화를 좋아하여 “한 점의 겨울이 한 송이 한 송이 동그랗게 피어나더니”라고 읊은 뜻을 헤아릴 만하다. 수선화를 들여다보니 빈 가지에 앉아 울던, 추운 새의 영롱한 울음소리가 한 번 더 들려오는 것 같다.
김승희 시인은 이 시에서 겨울 절기와도 같은 가난과 고독의 한가운데에서 핀, “총알처럼” 올라온 수선화를 노래한다. 모질게 시달렸지만 생명의 힘찬 의지로 밀치고 밀치며 불꽃처럼 피어난 수선화를 응시한다. 다른 시에서는 비록 아프더라도 “저절로 나을 때까지 아파야 그것이 봄이다”라고 썼는데, 한기(寒氣)가 가혹하니 이 고비가 지나면 저절로 나을 날이 올 것이다.
[조선일보 문태준 시인]
'글쓰기 공부방' 카테고리의 다른 글
| 선을 지우다 / 김광희 (0) | 2026.01.26 |
|---|---|
| 회계 / 요쓰모토 야스히로 (0) | 2026.01.26 |
| 삶의 총량 / 강석정 (0) | 2026.01.21 |
| 겨울의 사과나무 전지 / 라이너 쿤체 (0) | 2026.01.21 |
| 북성부두 / 이세기 (0) | 2026.01.2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