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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춘문예-단편소설 당선작] 강선과 팽나무-배은경 [농민신문]

귀촌일기 박뫼사랑 2026. 1. 9. 06:34
 

[강선과 팽나무 -배은경]

   농민신문 신춘문예 단편소설 당선작 

허리까지 오는 진입 금지판이 앞을 가로막았다. 보행자 안전을 위해 차량 및 오토바이의 출입을 금한다는 노란색 글씨가 갈색 바탕에 선명하게 보였다. 외국어로 된 긴 아파트 이름에 관리사무소라는 출처까지 한 글자도 빠짐없이 촘촘했다. 공공보행로로 개방은 했지만, 바퀴 달린 이동수단의 진입은 허가할 수 없다는 뜻이었다. 라운드형 볼라도 옆으로 네 개의 삼각판이 쇠줄로 연결돼 입구를 단단히 막고 있었다. 자전거를 탄 학생이 단지 안 보도블록 위를 지나갔다. 강선은 성인용 세발자전거의 앞바퀴를 좁은 틈으로 밀어 넣었다. 뒷바퀴와 꽁무니의 바구니가 볼라드 기둥에 걸렸다. 유모차에 탄 흰 개가 강선의 자전거 뒤에서 깡깡 짖었다. 강선은 자전거를 돌려세웠다. 입동을 넘긴 아침 공기가 코끝에 싸늘했다. 어제까지는 없던 바리케이드였다.

너덧 개월 전에 입주가 시작된 신축 아파트. 자전거를 끌고 가는 강선 옆으로 129동이 지나갔다. 그 뒤로 130동도 눈에 들어왔다. 고개를 완전히 젖혀야 건물의 끝이 올려다보였다. 30층은 넘어 보였다. 작은 소방도로를 사이에 두고 강선이 살고 있는 두 동짜리 장미맨션은 재개발 대상이 되지 못했다. 들어선 지 얼마 안 된 빌라들 사이에 본래의 자리를 잃어버린 듯 끼어 있었다.

새 아파트 입주민들 사이에서 장미맨션이 눈엣가시라는 소문이 들려왔다. 고층에서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어지러운 옥상이 마음에 안 드는 모양이었다. 바람이 많이 부는 날에는 옥상에서 윙윙거리는 소리가 난다고 민원이 들어왔다는 말을 관리소장에게서 들었다. 남 보기 좋으라고 옥상을 치워야 하냐며 관리소장은 인상을 찌푸렸다. 몇십 년을 살면서 강선에게는 한 번도 눈에 들어오지 않던 게 그들에게는 단번에 눈에 띈 모양이었다.

모퉁이를 돌자 모터 돌아가는 소리가 시끄럽게 났다. 강선은 아파트 펜스 너머를 바라보았다. 조경석이 쌓인 경사 끝에 화단과 베란다 유리 난간이 보였다. 인부 두 명이 전기톱으로 나무를 베고 있었다. 3층 베란다에 닿을 정도로 꽤 커 보이는 나무였지만 말라 죽은 모양이었다. 불에 탄 듯 새까맣게 뼈대만 남은 모습이었다. 반들반들 윤이 나는 새 아파트에서 죽은 나무라니. 날카로운 소리가 그치더니 나무가 옆으로 쓰러졌다. 나무가 가리고 있던 1층과 2층의 베란다창이 드러났다. 2층 베란다에 누군가 서서 아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유리 난간을 짚고 상체를 내민 젊은 엄마였다. 가지가 잘린 나무는 두 팔이 절단된 석고상의 모양으로 바닥에 누였다. 인부들은 둥치 가운데를 전기톱으로 잘랐다. 강선은 사람의 허리가 잘려나가는 모습이 상상돼 섬찟해졌다. 잘린 둥치와 가지가 트럭에 실리는 걸 지켜보며 몇 달 전 나무의 모습이 어땠을지 떠올려 보았다. 무탈해 보이는 다른 나무들도 새로운 땅에 뿌리를 내리려고 애를 쓰는 중이리라.

2층 베란다에서 시선이 멈췄다. 창에 붙어 서 있던 여자가 보이지 않았다.

발길을 돌리려는데 중앙 현관에서 여자가 걸어 나왔다. 베란다에서 멀찍이 떨어지더니 자신의 집을 올려다보았다. 강선도 여자를 따라 2층 베란다를 쳐다보았다. 커튼을 걷어 놓은 거실이 고스란히 들여다보였다. 외투를 걸치지 않은 여자의 어깨에 한껏 힘이 들어가 있었다.

강선은 페달을 굴리며 자전거에 올라탔다. 세발자전거의 바퀴가 천천히 돌아가기 시작했다. 아파트를 가로지르면 금방일 길을 빙 둘러 가야 했다. 한쪽에 쌓아둔 보도블록 조각이 보였다. 아스콘 포장 일정을 알리는 안내판도 보였다. 자전거의 앞바퀴가 울퉁불퉁한 길에 자꾸만 걸렸다. 그럴 때마다 강선은 균형을 잃지 않으려고 핸들을 더욱 세게 잡았다. 잠시 멈칫거리다 보면 뒷바구니에 실어둔 늙은 호박의 무게가 묵직하게 느껴졌다. 호박을 떼오는 도매상이 있었지만, 502호가 시골 동생네서 따왔다는 걸 뺏다시피 받아온 호박이었다. 둥글넓적한 몸통을 하얀 분이 덮고 있었다. 도매상에서 떼오는 호박과는 빛깔부터가 달랐다. 달큼한 육질이 들어차 있을 속을 생각하니 입에는 침이 고였다.

 

가스불 위에서 호박이 끓고 있다. 껍질을 벗기고 속을 파낸 뒤 나박하게 조각을 내 흐물흐물해질 때까지 삶았다. 강선은 뚜껑을 열어 호박 상태를 확인했다. 뜨거운 김이 단내와 함께 올라왔다. 불을 줄이고 핸드블렌더를 솥 안에 넣었다. 블렌더가 닿는 자리마다 작은 소용돌이가 일었다. 강선은 호박이 되직해지도록 갈았다. 블렌더를 절굿공이처럼 움직이던 강선의 눈에 벽에 핀 곰팡이가 보였다. 천장에서 시작된 곰팡이는 모서리를 타고 벽 중앙까지 내려와 있었다. 

시장은 아파트 신축 현장과 바로 붙어 있었다. 공사는 3년이 넘게 이어졌다. 502호는 공사가 무르익자 가게를 그만두었다. 즉석김을 구워 팔던 작은 점포였다. 가게 문을 닫은 건 502호뿐만이 아니었다. 시장 주변이 공사판이 되었고 집단 이주로 손님도 줄어 먼지와 파리만 날리던 때였다. 시장 상인회는 재개발조합으로부터 공사 피해 보상금을 받았고 조합원이었던 502호는 새 아파트 입주민도 되었다. 일찌감치 장미맨션을 팔고 재개발 지역의 주택을 매수한 덕분이었다. 강선은 같은 복도를 쓰던 502호를, 이사를 갔어도 502호라 불렀다. 

점포가 하나둘 문을 열기 시작했다. 공사 막바지까지 장사를 했던 반찬 가게가 먼저 문을 열었다. 지역 온라인 카페 입소문을 타고 손님이 부쩍 는 모양이었다. 정육점, 야채가게, 과일가게도 장사를 이어갔다. 인테리어를 새로 하지 않고 옛 점포 그대로 장사를 재개했다. 제대로 된 간판 대신 가게 이름이 인쇄된 현수막을 내거는 가게도 있었다. 간판은 없어도 잘 보이는 곳에 은행 계좌번호를 붙여 놓는 것은 빼놓지 않았다. 기존 점포들 사이로 새롭게 문을 연 가게도 보였다. 강선의 가게 맞은편에 망고와 망고스틴이라는 간판이 도드라졌다. 잘 익은 망고와 망고스틴의 빛깔로 상호가 쓰여 있었고 과일도 앙증맞게 그려져 있었다. 내부도 단장을 하고 새시도 깔끔하게 교체를 했다. 새 아파트에 젊은 사람이 많다더니 그들을 염두에 두었나 싶었다. 강선은 찹쌀가루처럼 하얀 새시와 벽을 자꾸만 돌아보았다.   

502호는 장사를 재개하지 않았다. 그러곤 강선에게 장사를 권했다. 자신의 점포에서 장사를 해보라는 것이었다. 보증금 없이 월세만 받겠다고 했다. 내가 자기 형편 모르는 것도 아니니, 라는 말도 빼놓지 않고서. 

곱게 갈린 호박에 찹쌀가루를 풀어 골고루 섞일 때까지 저었다. 마침맞게 간을 하고 미리 삶아 놓은 붉은 강낭콩을 띄웠다. 강선은 한 김 식힌 다음 용기에 옮겨 담으리라 생각하며 불을 껐다. 점심이 되기 전에 녹두전과 삼색꼬치전을 해 놓으면 장사 준비는 끝난다. 죽이나 전을 줄이고 내일부터는 순대와 튀김을 팔아볼 계획이다. 얼마 전부터 죽과 전을 떨이로 내놓아도 소진이 되지 않았다. 물량을 줄이고 다른 걸 팔아보는 쪽으로 생각이 돌았다.

녹두가루를 풀고 있는데 502호가 다가왔다. 접이식 빈 카트가 덜덜거리며 따라왔다.

“누구네 호박인지 곱기도 하네.” 502호가 호박죽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자네 호박은 아직이야.” 강선은 선반에 놓인 호박을 가리켰다. 

“자기 것처럼 안고 갈 때는 언제고.”

“저놈 삶으면 자네부터 맛보일 테니 오늘은 이놈으로 먹어.”

강선이 용기에 죽을 담아 빈 카트에 싣자 502호는 현금통에 오천 원짜리 한 장을 밀어 넣었다. 강선이 놔두라며 손사래를 쳤지만, 마디 굵은 손을 502호가 부여잡으며 막았다. 어렵사리 얻은 호박은 누구라도 대접할 일이 생기면 삶을 작정이었다.

강선은 502호가 모서리의 곰팡이를 쳐다보는 걸 놓치지 않았다. 이제 다른 사람의 눈에도 띄는 모양이었다. 천장 귀퉁이 세 모서리에 새까맣게 줄이 난 지가 꽤 되었다. 팔이 닿지 않아 이날 저날 미뤄 둔 것이 손을 쓰기 버거울 정도로 번져 버렸다. 한 번 곰팡이가 앉은 자리는 닦아내도 다시 핀다는 걸 알기에 엄두를 안 냈는지도 모른다. 그래도 막 눈에 띄었을 때 손을 썼어야 했을까. 주춤하는 사이 손쓸 때를 놓쳐버렸다.

계산을 마친 502호가 휴대전화를 꺼내 들었다. 카톡창을 한참 내리더니 강선의 눈앞으로 전화기를 내밀었다.

“여기 좀 봐!”

입주민 단톡방이었다.

“이 밑으로 달린 다른 글도 보라고.”

 ‘새로 생긴 시장 죽집 비위생적이라 별로!’ 그 밑으로 비슷한 내용의 글이 더 보였다. 강선은 침침한 눈을 찡그리며 글씨를 읽었다. 유독 한 사람이 그런 가게는 이용을 자제해야 한다는 글을 계속 올렸다. 유리천사4087. 강선은 입에 붙지 않는 닉네임을 읽었다.

“이 사람이 누구야?”

“나도 모르지. 얼마 전엔 김밥집이 코팅이 벗겨진 프라이팬을 쓴다고 말이 많았어.”

오랫동안 문을 닫아둔 가게였지만 내부 단장까지 할 여력은 없었다. 조리 시설만 새로 갖추고 장사를 시작했다. 청소를 했어도 오래 묵은 때가 사람들의 눈에 고스란히 띈 모양이었다. 강선은 낭패감과 부끄러움에 얼굴이 화끈거렸다.

‘저런 가게 때문에 시장을 이용하기 꺼려져요.’

“아니 저런 말을 여기다 대고 하면 어떡해?”

강선이 격앙된 어조를 보이는데도 502호는 휴대전화 커버를 덮지 않았다. 

“이 여자는 시장이 아예 마음에 안 드나 봐. 편의점 앞에 내놓은 의자도 걸고 넘어진다니까.”

502호는 얼른 화제를 돌렸다. 

“거기 앉아 담배도 피고 술도 마시는 게 보기 싫나봐. 하긴 침도 뱉어 놓으니… 거기서 늘 밥 먹는 사람도 있잖아. 꾀죄죄하니 냄새나는 남자 말이야. 동네가 공사판일 때야 티가 안 났는데 지금이야 다르지.”

“그 사람도 먹고살아야지. 갑자기 어디로 사라지기라도 하란 말이야?”

강선도 길모퉁이 편의점 앞에서 컵라면을 먹던 남자를 가끔 보았다. 차림새로 보아 노숙인도 인부도 아닌 듯했으나 무슨 일인지 밖에서 끼니를 해결하고 있었다. 공사가 한창이던 때라 먼지도 함께 먹고 있는 것 같았다. 오죽하면 저기서 밥을 먹을까 싶으면서도 남자에게서 나는 냄새라도 묻을까 피하게 되었다. 강선은 자신을 향한 비난인 양 남자를 두둔하면서도 자신의 가게가 남자와 같이 묶이는 데 은근히 속이 상했다. 

“주위 환경이 좋아야 아파트값도 오르니까 저러는 모양이야.”

502호는 자신은 상관없는 일이라는 듯 말했지만, 시장 골목을 마뜩잖게 훑어보았다. 

“그럼 가게 문을 닫기라도 하라는 소리야?” 

강선은 불쑥 내뱉었다. 502호에게 한 말은 아니었지만, 그녀에게 화를 낸 꼴이 되고 말았다. 502호는 무안했는지 전화기 덮개를 탁 소리가 나도록 덮었다. 강선은 그 소리에도 굳어진 얼굴을 풀지 못했다. 어림없다는 생각이 들면서도 가게문을 닫는 일이 일어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머릿속을 밀고 들어왔다.

 

학교 쪽으로 향한 아파트 쪽문에서 부모들과 아이들이 쏟아져 나오고 있었다. 아파트 공공보행로를 가로질러 온 아이들까지 뒤섞여 바리케이드를 쳐놓은 쪽문은 와글와글 붐볐다. 걸어서 등교를 하자고 보람이를 구슬려 보았지만 어린 것이 고집을 꺾지 않았다. 강선이 이웃과 아침 인사를 나누는 사이 자전거 뒷바구니에 먼저 올라타 할머니를 불렀다. 태울 수 있을 날도 얼마 남지 않았다는 생각이 드니 손녀의 청을 들어주지 않을 수 없었다.

“할머니, 할머니! 오늘도 전학 오는 애가 있을까? 자꾸 오니까 애들이 헷갈린대. 난 하나도 안 헷갈리는데. 이름도 다 외었어. 강윤서, 그다음에는 박채민, 또 이민지 또⋯. 근데 우리 아파트는 아니야. 우리 아파트에 사는 친구들도 왔으면 좋겠는데.”

뒷바구니에 탄 보람이가 재잘거렸다.

“입에 바람 들어갈라.”

강선은 슬쩍 뒤를 돌아보았다. 초겨울 아침 공기가 제법 찼다.

“채민이다. 할머니, 채민이!” 

보람이가 한 남자아이를 가리켰다. 보람이가 손을 흔들었는지 남자아이도 머쓱하게 손을 들었다. 남자아이의 엄마가 뒷머리에 난 까치집을 손으로 빗겨주며 함께 걸어오고 있었다. 낯익은 얼굴! 며칠 전 나무가 베어지던 걸 걱정스럽게 바라보던 여자였다. 어제 502호가 보여준 단톡방 대화 내용이 떠올랐다. 중앙광장의 팽나무도 베어지자 곳곳에 베어진 나무는 언제 심냐며 불만이 이어지고 있었다. 그 여자와 유리천사, 그리고 채민 엄마. 아들이 손을 흔들자 여자도 강선을 바라보았다. 짧은 순간 눈이 마주쳤지만, 여자는 이내 고개를 돌렸다. 강선은 아들과 함께 사람들에 묻히는 자그마한 여자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삐뚤어진 어깨끈을 바로잡아 주며 강선은 보람이의 볼을 쓰다듬었다. 

“학교 끝나면 전화하고.”

보람이가 고개를 끄덕이자 가방에 달아둔 토끼도 달랑거렸다. 

“보람아.”

“왜, 할머니?”

“채민이는 몇 동에 산대?”

“몰라. 물어볼까?”

강선은 어린것에게 괜한 것을 물었다 싶었다.

“아니야, 얼른 가!”

강선은 보람이가 교문 안으로 사라질 때까지 지켜보았다. 일 년이 무사히 지나가고 있다. 젊은 부모도 일 학년짜리를 키우려면 직장을 쉰다는데 나이 든 자신이 보람이를 잘 챙길 수 있을지 걱정이었다. 아들을 어떻게 키웠는지는 기억나지도 않았다. 다시 일 학년짜리 학부모가 될 줄은 생각지도 못한 일이었다. 

아들은 두 돌이 지난 보람이를 데려다 놓곤 소식이 뜸했다. 일주일이 한 달이 되고 두 달이 되더니 이제는 일 년에 한두 번 전화가 온다. 아파트를 담보로 빼간 대출금도 강선이 갚고 있다. 강선은 보람이가 클 때까지는 아들은 없는 사람으로 여기기로 했다. 세상에 오롯이 자신만 있다고 믿어야 딴생각이 들지 않을 것이다. 나누어질 수 없다면 혼자서 감당하는 편이 나았다. 강선은 이제 아들의 전화를 기다리지 않는다. 기다리지 않으니 갑갑하던 마음이 사라졌다. 보람이가 말했다. 할머니 이제 한숨 안 쉰다. 보람이의 눈에서 안심하는 빛이 느껴졌다. 자기도 모르게 한숨이 나오려고 할 때마다 어린것의 눈을 떠올렸다. 안도하는 눈망울 속에 그렁그렁 담겨 있던 불안의 물기도.

등교가 마무리된 교문 앞이 한산해졌다. 교문 앞에서 학생들을 맞이하던 선생님도 보이지 않았다. 강선은 집 쪽으로 자전거를 몰았다. 쪽문을 막아놓았으니 돌아가야 했다. 세발자전거는 두발자전거에 비해 속도는 덜 났지만, 안정감이 있었다. 어린 보람이를 태우고도 안심하고 달릴 수 있었다. 보람이를 어린이집에 맡겨 놓고, 시장으로 근처 아파트로 일거리가 있는 곳이면 달려갔다. 식당 설거지에 아파트 청소며 살림집 도우미도 했다. 유모차를 끌고는 바삐 다닐 수가 없었고, 늘 타고 다니던 두발자전거에는 어린 보람이를 태울 수 없었다. 궁리 끝에 세발자전거를 장만했었다. 두 돌짜리가 꼭 붙잡고 있으란 말을 용케도 알아들었다. 조막만 한 손을 철대에 쥐이며 꼭 붙잡고 있어야 한다고 이르면 제가 먼저 ‘아야 해, 아야 해.’라며 강선을 안심시켰다. 이제는 강선의 어깨를 짚고 대답해줄 새도 없이 재잘거린다.

자신의 점포에서 장사를 해보라는 502호의 제안이 처음부터 내킨 건 아니었다. 친한 사람일수록 돈거래를 하지 말라 하지 않았나. 502호의 아들과 강선의 아들이 동갑이라 더욱 친하게 지냈다. 어쩌다가 한쪽은 든든한 효자가 되고 한쪽은 소식조차 뜸한 불효자가 되었는지는 모르겠다. 아들이 보람이만 할 때까지 거슬러 올라가야 바로 잡을 수 있을까. 보람이라도 바르게 키워내야 했다. 여기저기 일을 다니는 것보다는 자신의 장사를 해야 돈이 모일 것이다. 금전 관계로 502호와 껄끄러워지지 않기 위해서라도 잘해보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자 없던 결심도 섰다.

보람이가 앉았던 자리에 쪼아먹다 남겨둔 참새 모이처럼 재잘거림이 흩어져 있다. 2학기 초에 학급을 늘린다는 안내가 있더니 전학생이 몰리는 모양이었다. 저 아파트의 나무들도 전학 온 학생들이나 다름없을 터. 강선은 외벽을 타고 쭉 뻗은 소나무를 바라보았다. 본래 곁가지가 없는지 전지를 많이 한 건지 길쭉한 둥치만 두드러졌다. 정비가 덜 된 도로에서 굵은 돌멩이 하나가 튀어올라 바퀴살을 건드렸다. 어제 502호에게서 들은 말이 생각났다. 무슨 나무가 2억씩이나! 

중앙광장의 팽나무. 커다란 나무가 쓰러져 있는 사진을 502호가 보여주었다. 빈 그루터기는 꽤 우람했을 나무를 짐작게 했다. 관리를 소홀히 한 위탁관리업체를 탓하는 글에서부터 애초에 시공사가 병든 나무를 심은 게 아니냐며 성토하는 글까지 어지럽게 섞여 있었다. 전문가라는 사람이 나서서 나무의 금액을 말하자 사람들이 입을 다물지 못하는 게 글에서도 느껴졌다. 

“봤어? 나무도 나무지만, 이 여자가 관리실에 가서 난리를 쳤나봐. 하자 보수는 자기들 소관이 아니라고 하니까 시공사에 전화해 자기 집 앞에 나무는 언제 심을 거냐고 따졌다잖아. 그걸 여기에 다 올렸네.”

강선은 무슨 말인가 싶었다. 

“이걸 보라고. 유리천사. 여기 곰팡이가 어쩌고 하던 여자잖아. 자기 집 앞 나무 사진도 올렸어.”

비스듬하게 잘린 밑동이 눈에 들어왔다. 며칠 전에 잘려 나가는 걸 보지 않았다면 밑동만 갖다 심은 줄 착각할 정도로 주변 흙이 정리돼 있었다. 불안한 뒷모습을 보이며 2층 창을 올려다보던 여자가 유리천사고 채민 엄마였다. 

남의 가게는 그렇게 욕을 하면서 자기 집 앞의 나무는 어지간히도 애지중지하는구먼. 자신의 가게에도 들이닥치지 않을까 싶었지만 같은 반 학부모끼리 대놓고 얼굴을 붉힐까 싶기도 했다. 보아하니 입주자대표회의 사람도 아닌 것 같고… 아니 대표회의면 남의 가게에 대고 뭐라 해도 되나! 강선은 사람들을 선동하던 유리천사와 급하게 시선을 돌리던 채민 엄마를 나란히 떠올렸다. 자그마한 어깨와 흔들리던 시선의 채민 엄마. 핏대를 올리며 항의를 하는 유리천사는 그려지지 않았다. 유리천사라는 사람은 따로 있을 것만 같았다. 

저 앞에서 안전모를 쓴 사람이 신호봉을 흔들었다. 아스콘 포장을 하느라 출입을 막고 있었다. 강선은 자전거를 길가로 몰았다. 오늘은 장사 준비를 어떻게 하나 머리가 복잡해졌다. 할인가라기에 욕심껏 받아놓은 순대는 어쩌나 싶었다. 

월세 낼 날짜가 다가오고 있었다.

 

502호가 국화차를 권했다. 방금 따른 찻물에서 김이 올라왔다. 강선은 유리 티포트에 서 우려지고 있는 노란 꽃잎을 보며 너무 이른 시간에 들른 것은 아닌가 싶다가도, 통창 너머 보이는 겨울 아침 산봉우리에 머릿속이 흐릿해졌다. 

“이게 혈압에 좋대.”

찻잔을 바라만 보고 있는 강선에게 502호는 다시 차를 권했다. 한 모금 입술을 적시자 머릿속이 선명해지는 것도 같았다. 그렇게 깐깐하게 굴게 뭐람. 강선과 자전거를 들여보내 주며 동호수를 여러 번 확인하고 전화번호를 꼼꼼히 기록하던 입구의 경비원. 3504호라는 걸 까맣게 잊고 자꾸만 502호라고 했다가 직접 통화를 하고서야 바리케이드를 열어주었다. 502호가 너무 입에 익어서 그래. 그럴 만도 하지. 몇십 년을 그렇게 불렀는데.

대출금이 깔려 있지 않았다면 자신도 장미맨션을 팔고 이곳에 입주할 수 있었을까. 멀쩡한 나무 바닥을 걷어낸 뒤 대리석을 깔고 부분 조명에 가전제품과 가구까지 새로 한다고 할 때는 쓸데없는 치레라고 혀를 찼지만, 구색이 갖춰진 걸 보니 부럽기도 했다. 명악산이 한눈에 보이는 전망 좋은 동에 탑층 당첨까지, 502호의 연이은 행운에 자신도 얼떨떨했다.

“미달난 거 줍줍할 때 자기도 저질러 볼 걸 그랬어. 대출 내고 뭐하면 어떻게든 감당이 된다니까.”

자네한테는 빵꾸 나면 메꿔줄 든든한 자식이 있지 않느냐는 말은 차마 할 수 없었다. 주택 경기가 좋지 않을 때 높은 분양가로 일반 분양을 해서인지 대거 미달이 났다. 마음이 급해진 재개발조합에서 선착순 할인 분양을 단행하자 사람들이 기다렸다는 듯이 몰려들었다. 좋은 동과 층을 선점하기 위해 분양 사무실 앞에 늘어선 줄을 강선도 자신의 집에서 내려다보았다. 천막을 치고 밤을 새는 사람들, 번호표를 나누어 주는 직원들이 새벽부터 바쁘게 오갔다. 선호하는 동과 층은 조합원에게 이미 배정이 된 상태라 일반 분양자에게 돌아갈 좋은 물건은 귀했다. 그걸 줍줍하려고 줄을 선 사람들이었다.

“대책 없이 분양받았다가 재미도 못 보고 헐값에 넘겨야 했을걸.”

“하긴 이자 감당이 안 되면 급매로 내놓아야 할 거야. 2년 되자마자 팔고 나가려는 사람들은 벌써부터 집을 내놨으니까.”

부동산 투자에 눈이 뜬 502호는 정보에 밝았다. 2년이라면 양도소득세가 감면되는 기간을 말하는 것이리라. 그새 집값이 올라야 조금이라도 차익을 챙길 수 있을 터.

“유리천사 같은 이도 그런 사람 중 하나일 거야. 여기가 옆 동 그림자 때문에 저층에는 해가 안 들어. 그이가 우리 라인 2층 여자더라고. 그러니 주변 환경이라도 좋아야 하지 않겠어? 나무를 베고 나니 거실이 훤히 들여다보이니 그 난리를 친 모양이야.”

“2층을 잡은 걸 보니 막차를 탄 모양이군. 심보를 곱게 써야 복을 받지.”

한마디 보탠다는 게 채민 엄마 험담을 하고 말았다. 강선은 속이 후련하면서도 괜한 말을 했나 싶었다. 그렇다고 본심이 아닌 건 아니었다. 강선은 이제 502호에게도 마음속으로 굴리던 말을 풀어놓아야겠다는 생각을 하며 헛기침을 했다.

“그래서 말인데. 가게 칠을 새로 하면 어떨까?”

502호가 파래 고명이 얹힌 센베이를 오도독 소리가 나도록 베어 물었다. 강선은 경비를 대주면 장사가 회복되는 대로 갚겠다는 계획을 말하려던 참이었다. 

“이럴 줄 알고 내가 보증금을 안 받은 거야.”

자신이 이런 말을 꺼낼 줄 짐작이라도 했다는 건가. 강선은 가게 안쪽에 방치된 김 굽는 기계는 어쩔 거냐는 말이 올라오는 걸 애써 눌렀다. 502호가 보증금을 들고나오는 데는 달리 응수할 말이 없었다. 기계는 내일이라도 들어내면 그만일 것이다. 강선은 더 이상 대꾸할 말을 찾지 못했다. 외투 주머니 속에 든 돈봉투를 소리 나지 않게 만지작거렸다. 월세가 밀리더라도 칠부터 하면 어떨지 가늠해 보았다. 그랬다간 신축 입주 후 상승한 주변 점포 시세를 꺼내며 강선의 말문을 또다시 막아버릴 것이다. 502호의 구구절절한 말을 듣고 싶지 않았다. 강선은 주머니에서 봉투를 꺼냈다.

“이번 달 월세야.”

“편하게 이체를 하라니까.”

502호는 봉투의 두께를 가늠해 보고는 방석 밑으로 밀어 넣었다. 부족액을 채우느라 카드 대출을 받았다. 502호가 수중에 들어온 걸 좀처럼 내놓지 않는다는 걸 알고 있었지만, 자신의 처지를 봐줄 거라 기대도 했었다. 

유리 포트의 찻물에서는 더 이상 김이 피어오르지 않았다. 곁들여 내놓은 센베이 하나가 귀퉁이를 베어 물린 채 접시 위에 놓여 있었다. 

502호가 엘리베이터까지 배웅을 나와주었다. 1층을 누르고도 한동안 문이 닫히지 않았다. 짧은 시간 강선과 502호는 멋쩍게 마주 보았다. 문이 닫히기 시작하자 502호가 무슨 말인가를 했다. 다음에는 꼭 이체를 하라는지, 다음에 또 들르라는지 끝까지 듣지 못했다. 강선은 다음에는 호수를 제대로 말하리라 생각하며 3504호를 되뇌었다. 

엘리베이터 문이 닫히자 공고문이 눈에 들어왔다. 고사한 나무를 다시 심는다는 안내였다. 중앙광장의 팽나무를 다시 심는 모양이었다. 재이식 날짜와 당부 사항이 적혀 있었다. 다른 나무의 재이식은 계획이 잡히는 대로 추후 실시한다는 글도 맨 아래에 작게 쓰여 있었다. 그 옆에 볼펜으로 휘갈겨 쓴 글씨가 눈에 들어왔다. 강선은 생각 없이 따라 읽었다. 씨이발!

망고와 망고스틴. 맞은편 가게였지만 출입이 선뜻 내키지는 않았다. 대낮인데도 환하게 밝힌 조명이 강선의 발길을 주저하게 만들었다. 벽에 핀 곰팡이가 눈에 띄고부터는 맞은편 가게의 환한 것만 보였다. 망고스틴의 문지방을 넘으며 강선은 저도 모르게 끙 소리를 냈다. 유치원 가방을 멘 젊은 엄마가 돌아보자 강선은 무릎을 꾹꾹 눌렀다. 딸기를 살피는 젊은 엄마와 긴 머리를 틀어 올린 중년 여자가 환한 불빛 아래 서 있었다. 강선은 검은색 패딩 조끼에 묻은 밀가루가 눈에 들어왔지만, 문지르거나 털지 않았다. 물건을 고르지도 않고 휴대전화만 들여다보던 중년 여자가 고개를 들어 강선의 어깨 너머로 시선을 던졌다. 강선도 여자를 따라 고개를 돌렸다. 어깨가 떡 벌어진 젊은 사장이 들어오고 있었다.

“딸기 두 팩, 김치 한 박스 찾으러 왔어요.”

“네, 네.”

미리 주문이라도 받아놓았는지 사장은 챙겨둔 물건을 여자의 카트에 실어 주었다. 젊은 엄마도 딸기와, 비닐에 담긴 물건을 받아들고 가게를 나갔다. 

강선은 사장에게 물었다.

“저 엄마가 사가는 게 뭐예요?”

“아, 돼지갈비입니다.”

“과일만 파는 게 아닌가 봐요?”

“밀키트도 팔고 야채도 있어요. 한 번 둘러 보세요. 공구라 가격도 착해요.”

강선은 반은 알아듣고 반은 알아듣지 못했다. 밀키트는 뭐고 공구는 뭔지. 가격이 착하다는 건 싸다는 말일 테고. 사장의 휴대전화가 연거푸 웅웅거렸다. 

“방금 신상을 올렸더니⋯.”

휴대전화를 보던 사장이 강선을 쓱 보았다.

“죽집 사장님이시죠?”

사장은 강선을 알아보고 웃으며 인사를 건넸다. 자신을 알아봐 주자 강선의 얼굴에 미소가 떠올랐다. 주저되던 마음에 힘이 들어갔다. 

“뭐 좀 물어보려고요.”

강선은 흰 벽을 둘러보며 가게가 깨끗하고 환해 보기 좋다고 운을 뗐다. 무슨 말을 하려는지 의아해하는 사장에게 강선은 얼른 본론을 끄집어냈다. 이렇게 칠하려면 얼마나 들까요? 잠시 눈을 끔벅이던 사장이 얼른 강선의 말을 이해하고 답을 내놓았다. 바닥과 조명까지 한꺼번에 공사해서 페인트 비용만은 알 수 없다고 했다. 재료비보다 인건비가 문제라는 말에 직접 칠하면 안 되겠냐는 말이 튀어나왔다. 그러다간 병원비가 더 들지 않을까요, 라는 건 으레 하는 말이겠거니 흘러 들렸으나, 해보신 적이 있으세요? 라는 말에는 마음속에 품었던 일말의 무모함이 푹 꺼지는 기분이었다. 그렇다고 한 줄기 가능성까지 꺼뜨리지는 않았다. 다른 방법이 없진 않을 것이다. 바쁜데 고맙다는 말을 하고 돌아서려는데 사장이 덧붙였다. 

“칠도 좋지만, 오염이 심한 곳은 시트지 같은 걸 붙여 보세요.”

자세히 물어보려는데 손님이 들어왔다.

강선은 오후에 끓여 따로 담아둔 죽을 기울어지지 않게 앞바구니에 실었다. 502호네서 받아온 호박으로 끓인 죽이었다. 보람이 생일쯤에나 삶아 보려던 호박이었다. ‘어제도 시장에서 쥐를 보았어요. 죽집 근처에서요. 쥐가 우리 아파트로 건너오면 어떡해요.’ 유리천사는 이런 글을 계속 올리고 있었다. 동조하는 글도 간간이 올라왔다. 강선은 조리대까지 말끔하게 정리된 것을 확인하고 가게 문을 잠갔다. 평소보다 조금 이른 시간이었다. 

옆으로 긴 직사각형 모양의 아파트 문주가 보였다. 대리석으로 된 기둥과 상판이 육중함을 자아내고 있었다. 5톤 이상 이삿짐 차량도 무리 없이 드나들 수 있을 정도의 높이와 폭이었다. 강선은 게이트로 들어섰다. 

경비실이 있는 오른쪽을 피해 왼쪽으로 난 길로 자전거를 끌고 갔다. 경비실 쪽에 개폐식 펜스가 보였지만 열어달라고 할 엄두가 나지 않았다. 동호수와 전화번호를 물어보면 둘러댈 말이 없었다. 강선은 경비실을 살피며 지하 주차장 진출입로로 자전거를 끌고 갔다. 급히 내려가다 보니 내리막길에서 힘이 부쳤다. 제멋대로 굴러가려는 바퀴를 틀어 무사히 평지로 내려섰다. 안으로 들어가자 조명이 켜져 있는데도 어두컴컴했다. 깊은 바다를 잠수하는 기분이 들었다. 강선은 120동을 찾아 주위를 둘러보았다. 안내 표시가 보이지 않았다. 엉거주춤하고 있는데 뒤에서 클락슨이 울렸다. SUV 전기차가 소리도 없이 다가와 있었다. 벽 쪽으로 급하게 자전거를 붙였다. 120동이라는 커다란 글자가 오른쪽에 보였다. 120동 204호! 강선은 다시 한 번 동호수를 확인했다. 

같은 반 학부모라면 사정을 봐주지 않을까 싶었다. 502호와도 그렇게 해서 좋은 이웃이 되지 않았나. 같은 또래의 아들을 키우면서 속상한 마음을 터놓고 더욱 돈독해졌으니까. 이쪽에서 먼저 마음을 트면 저쪽에서도 날이 선 마음을 가라앉히지 않을까 생각되었다. 하지만 어디선가 자신의 순진함을 비웃는 목소리가 들리는 것도 같았다. 

한참 만에야 나오는 사람이 있어 안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자 204호 현관문이 바로 보였다. 

손에 든 죽에 온기가 남아 있었다. 강선은 따스함을 쓰다듬으며 벨을 눌렀다. 현관문을 경쾌하게 두드리는 듯한 기계음이 울렸다. 강선의 심장도 두근거렸다. 아무도 나오지 않고 기계음만 계속 울렸다. 다시 벨을 누르려는데 누구세요, 하는 젊은 여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청소기라도 돌리던 중이었는지 숨을 고르는 기색이 섞여 있었다. 채민이 집이지요? 누구신데요? 여자에게서 낯선 사람에 대한 경계심이 묻어났다. 강선은 숨을 고르고 또박또박 자신을 소개했다. 채민이 같은 반 보람이 할머니예요. 여자가 누군가와 말을 주고받는 소리가 인터폰 너머로 들렸다. 그런데요? 강선의 기대와는 달리 현관문은 열리지 않았다. 잠시 얘기 좀 할 수 있을까요? 정적이 흐르더니 다음 말이 이어졌다. 무슨 일인지 모르겠지만 지금 좀 바빠서요. 여기서 물러나면 여자가 인터폰 속으로 사라질 것이다. 강선은 다급하게 말을 꺼냈다. 잠시만요. 애기 엄마. 다음에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떠오르지 않았다. 상상했던 장면이 그려졌다. 채민이도 보람이를 안다고 하면 친하게 지내라고 머리를 쓰다듬어 준 뒤, 채민 엄마가 차라도 내오면 특별히 끓인 죽이니 맛을 보라고 내놓을 작정이었다. 혹시나 채민 엄마가 한술 뜨기를 주저한다면 가게를 새로 단장할 계획이니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며 안심을 시키고 나이 든 할머니가 어린 손녀를 키우고 있으니 잘 좀 봐달라고 없는 너스레도 떨어볼 생각이었다. 

불쑥 어떤 말이 떠오르며 머릿속 장면이 지워졌다. 아니 정말 하려던 말인지도 몰랐다. 부탁할 게 있어요!

“저, 시장 죽집 알지요? 그러니까 내가⋯그 집, 할머니예요.” 

“하⋯.”

여자의 탄식. 들릴락 말락 한 짧은 욕. 강선은 잘못 들은 줄 알았다. 

“입주민 단톡방에 올린 글 봤어요… 이제 올리지 말아줘요.”

채민인 듯싶은 남자아이가 엄마를 불렀다. 여자가 가만히 있으라며 짜증을 내는 소리가 고스란히 들렸다. 

“무슨 글을 말하는지 모르겠지만 저는 모르는 일이에요.”

강선도 멈출 수가 없었다. 

“나무 베던 날… 채민 엄마를 봤어요. 나무 때문에 속상해하는 글도요.”

“나무랑 할머니랑 무슨 상관이세요?”

“채민 엄마가 유리천사 아니에요?” 

짧은 순간 정적이 흘렀다.

“스토커세요? 사람 뒤를 캐고 다니시네요. 그 나무 때문에 제가 얼마나 속상한 줄 아세요. 그 나무를 보고 이 집을 샀다고요. 그런데 나무가 죽었단 말이에요. 언제 다시 심을지도 모른대요. 우리 집이 밖에서 훤히 보여요. 그런데 시장까지 개판이에요.”

여자는 거친 말까지 쏟아냈다. 강선은 여자의 말을 멈추게 할 말을 찾아 머리를 굴렸다. 생각이 금방 말이 되어 나오지 않았다.

“가게를 다시 꾸밀 계획이에요. 그러니 다음에는…”

“그럼 됐네요. 돌아가세요. 이런 일로 다시는 찾아오지 마세요.”

인터폰이 꺼졌다. 강선은 온기가 사라진 죽을 들고 검은 화면에 비친 자신의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화면 속 얼굴이 자신에게 무슨 말인가를 하고 있는데 그것이 무엇인지 알 수가 없었다. 여자에게도 말 못 할 사정이 있을 것이다. 자신도 보람이를 홀로 키우고 있지 않는가. 여자가 문을 열어주었다면 자신의 사정을 말할 수도 있었다. 그렇다고 무턱대고 사정을 봐달라는 건 아니었다. 여자가 나무 때문에 속이 상한 속내를 비친다면 함께 걱정해 줄 생각이었다. 화면 속 얼굴이 말하고 있었다. 어림없지. 세상이 달라졌어. 

그래 세상이 변했어. 낯선 사람에게 누가 문을 열어주겠어. 과일가게라고 과일만 파는 것도 아니고, 가만히 앉아서 손님을 기다리는 것만도 아니니까. 무단 침입으로 신고당하지 않은 걸 다행으로 생각해야 하나. 강선의 자전거가 커다란 문주를 빠져 나왔다. 들어갈 때와 달리 나올 때는 수월했다. 

강선은 자전거를 끌며 느리게 움직였다. 초겨울 저녁 바람이 핸들을 쥔 손끝을 시리게 했다. 편의점 앞을 지나는데 찬 공기 속에 허름한 차림의 남자가 앉아 컵라면 뚜껑을 열고 있었다. 김이 확 올라왔다. 소식이 없는 아들이 생각났다. 여자에게 주려던 죽이 앞바구니에 실려 있었다. 저이에게 죽을 건네면 받아줄까. 어림없다는 말이 머리에 맴돌았다. 강선은 발걸음을 재촉했다. 앞바퀴가 자신의 복잡한 머릿속처럼 빙그르르 돌았다. 강선은 자전거를 세운 뒤 죽을 들고 남자에게 다가갔다. 드셔 보시겠소? 남자가 젓가락질을 멈추고 강선을 올려다보았다. 남자가 죽이 담긴 팩을 바라보았다. 남자 쪽으로 밀려고 강선이 손을 올리자 남자가 먼저 손을 대고 당겼다. 죽이 아주 조금 남자 쪽으로 움직였다. 따뜻하게 데워 드시우. 

강선은 무거운 자전거를 끌고 있다는 걸 그제야 깨달았다. 나오려는 한숨을 애써 누르며 자전거에 올라탔다. 아스콘 포장이 끝난 길 위로 자전거가 미끄러졌다. 빠르게 구르던 바퀴가 서서히 느려지더니 멈췄다. 잠시 멈칫하던 자전거는 시장 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가게 문을 열고 청소를 해야겠다. 헌 집기도 들어내고 말끔하게 닦은 뒤 시트지를 붙여야겠다. 이번에는 늦지 않았길, 손쓸 기회가 아직 남았길 강선은 바랐다.

 

[단편소설 당선소감] 반전이 살아 있는 소설 창작 꿈꿔 “한땀 한땀 정밀한 문장 써나갈 것”


 

늘 자신만의 이야기를 가지고 싶었습니다. 이야기 속에 비밀을 숨겨놓고 독자에게는 조금씩만 보여주는 거지요. 비밀의 마지막 조각을 맞추었을 때 예상과는 전혀 다른 내용이 되는 이야기, 흔히 말하는 반전이 살아 있는 이야기 말입니다. 통쾌하게 속이고 유쾌하게 속아주는 작가와 독자 사이, 그런 관계를 맺고 싶었습니다. 제가 과연 잘 해낼 수 있을까요? 좋은 소설에는 좋은 문장도 필요하다는 건 조금 늦게 알게 됐습니다. 문장 하나를 만들기 위해서는 한땀 한땀 이상의 정밀함과 집중력이 장착돼야 했습니다. 그래야 소설이라는 집을 지을 터를 다질 수 있으니까요. 하지만 늘 조급함이 앞섰습니다. 어서어서 기둥을 세우고 인물을 들어앉힐 생각을 했습니다. 그러다 출구도 없는 집에 제가 갇히는 꼴이 되기 일쑤였지요. 어쩌면 숨겨놓고 싶던 비밀은 소설 그 자체였는지도 모릅니다. 잘 숨겨보겠습니다. 부디 잘 속아 넘어가주십시오.

이 모든 것의 시작이 되어준 경북대학교 연극반에 애정을 보냅니다. 우리의 열정은 헛되지 않습니다. 글쓰기 공작소 이만교 선생님과 동인들에게 감사드립니다. 우리가 바친 시간은 사건의 지평선을 넘어 소설을 데리고 돌아옵니다. 가족들에게 미안합니다. 몰라도 될 저의 모습을 많이 알게 해서요. 삼대가 덕을 쌓아도 보고 싶지 않을 몹쓸 깜찍함까지도 말입니다. 소설을 인연으로 만났던 많은 분들 잊지 않고 있습니다, 당신들이 저에게는 소설이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늘 함께해준 친구 영애에게 고마움을 전합니다. 부족한 작품 뽑아주신 이순원·김인숙 선생님과 농민신문사에 머리 숙여 감사드립니다.

 

배은경 ▲1972년 경북 영주 출생 ▲경북대학교 국어국문학과 졸업

 

[심사평] 신축 아파트 앞 동네 원주민 이야기 미묘한 갈등·감정 현실감있게 묘사

 

예심을 통과해 올라온 작품 가운데 결선작으로 네편을 골랐다.

‘어제의 마음’은 새를 키우는 모녀의 이야기로 새의 이름이 ‘어제’인 것도 재밌고, 그런 어제와 함께 모녀의 지난 삶과 지금의 모습을 진솔하게 그려낸다. 단정한 문장으로 그려내는 이야기가 잔잔한 감동을 주기는 하지만 작품 자체가 긴 수필 같거나 소설로는 소품 같은 느낌이다.

‘고래들’은 산업재해 현장을 다룬 작품이다. 산업재해는 어디서든 일어나지만 어떤 직업군을 대상으로 하든 삶의 핍진함이 함께하는 소재다. 때로 그런 현장에서 위험한 사고를 용케도 피하고 나면 ‘아직은 살아 있다’는 것이 마냥 우습게 여겨지기도 한다는 결말의 냉소와 반어적 무거움도 있다. 작품 내용의 뜻은 좋으나 스토리 라인이 다소 산만하다는 점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집중과 치밀함이 필요하다.

‘물든 나’는 장마철 비가 내리는데도 공사를 따낸 숙박 건물의 완공 기일을 맞추기 위해 동분서주하는 건설공사 현장의 노동자와 감독자, 보조 감독들의 고군분투하는 모습을 현장감 있게 그려냈다. 공을 들여 쓴 문장의 내공도 만만찮고 빗속 공사 현장의 긴장감도 잘 살려냈다. 그러나 건설 방면에서는 익숙한 말이라 하더라도 전문 용어가 너무 많이 나와 수시로 용어 해설을 찾아가며 작품을 읽어야 하는 불편함이 곳곳에 독서 흐름을 방해한다. 전체 긴장감에 비해 결말 처리도 안이한 느낌이다.

‘강선과 팽나무’는 새 아파트 단지 앞 허름한 맨션에 사는 원주민 할머니의 이야기를 그렸다. 주인공 강선은 새 아파트 단지 앞 시장에 죽집을 새로 차렸다. 아파트 주민들 사이에 재래시장에서 쥐가 나왔고 아파트로 옮겨오지 않을까 걱정스럽다는 말들이 나오는데, 이런 여론을 주도하는 사람이 강선의 손녀와 같은 반 아이의 엄마다. 찾아가서도 면박을 당하고 오면서도 이제 가게를 좀 더 깨끗하게 치우는 등 아직 손쓸 기회가 남았길 바라는 강선의 간절한 마음을 아주 잘 표현했다. 오직 한 작품을 뽑는 것이라 작품마다 장점과 단점을 동시에 지적할 수밖에 없는 심사의 현실을 감안하더라도 문장과 작품 완성도에서 가장 뛰어난 이 작품을 당선작으로 올린다. 낙선자도 당선자도 이 한번이 저마다 문학의 끝이 아닌 만큼 부디 정진하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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