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세계 / 이민하
그해 겨울 세상이 다 덮힐만큼 눈이 내려서
눈싸움을 하다가
그런데도 겨울이 끝나지 않는구나
일기예보만 보다가
모르는 교통수단이 운행되고
모르는 경작 방법이 도입되고
겨울을 먹고 겨울을 싸고
겨울을 달리고 겨울을 멈춰도
인생이 다 덮일 만큼 겨울이 쌓여서
겨울잠만 자다가
그런데도 세상이 끝나지 않는구나
이제는 눈에서 눈을 뗄 수 없고 눈에서 삶을 뗄 수 없구나
눈으로 일기를 쓰고 눈으로 편지를 쓰고 눈으로 시를 쓰다가
눈은 뭉치기 좋은 것
눈은 뭉개기에도 좋은 것
눈옷을 입은 소녀들이 발을 구르며 빙글빙글 춤을 추고
눈밭 위의 소년들이 희끗희끗 씨를 뿌리고
연인들은 눈꽃으로 부케를 만들고
반려견들은 눈길 위로 웨딩 카를 끌고
눈으로 밥을 짓고 눈으로 집을 짓고 눈으로 이름을 짓다가
그러고도 남은 눈은 사람을 만들었다
[이민하 '우울과 경청' 창비 2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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