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쓰기 공부방

포도 / 임주아

귀촌일기 박뫼사랑 2025. 12. 26. 06:16

찐득찐득한 사랑 시다. “나의 연애는 포도처럼 작고 달고 찐했”다지만 아름답기만 한 사랑은 아닌 것 같다. 포도는 달콤하지만 뭉개지면 검푸른 멍처럼 어두운 법. 화자는 온전한 한 송이의 포도 대신 “포도잼에 빠진 쪼글쪼글한 건포도”를 자기 사랑이라 명한다. “터질 듯 익은” 나의 사랑은 충분히 시작하기 전에 이미 끝난 듯 보인다. 포도 한 송이를 다 먹는 동안 “너는 나에게 오지 못하고 올 생각이” 없다.

껍질이 벗겨져 뭉개진 사랑, 그러나 펄펄 살아 날뛰는 사랑을 포도라는 과일로 이렇게 생생하게 표현할 수 있다니! 화자는 슬픔을 유희로 승화하고 있다. 오지 않는 상대가 “포도탄 포도탄 포도 병정”이 되어 이 세계를 마저 다 부수어버리라고 권유한다. 헤어짐은 산산조각, 너덜너덜해진 감정의 전장이다. 투명 눈알(포도)이 포탄처럼 터지고 “꽉 찬 껍질이라 잘 정제된 피가 솟구쳤다 가라앉는” 전쟁을 방불케 하는 이별의 한복판을 보라.

이 시의 아름다움은 찐득한 시의 끝자락에 조심스럽게 놓인 한 줄기 여린 목소리다. “여름은 당신과 처음이었어요”라는 고요한 고백! 당신은 오지 않고 사랑은 파탄이 나 파리 떼가 들끓는 식탁 같지만, 그렇다 해도 그 사랑은 진심이었다는 고백이다. 주머니에 넣어두고 끝내 말하지 못한 말, 검붉은 눈물을 뚝뚝 흘리고 있을 것만 같은 말 아닌가. 그런데 당신과 여름은 처음이었다는 말과 여름은 당신과 처음이었다는 말은 전혀 다르다. 이 차이를 곰곰 생각해보는 것도 이 시를 읽는 묘미일 것이다.

 [농민신문 박연준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