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이 다녀간 자리 / 미선
책 속에 반쯤 꽂힌 책갈피,
더 깊이 들어가는 중인지
빠져나가는 중인지,
기다린 세월 만큼 눌린 자국 깊다
오는 듯
뒷모습 보이는 너처럼.
(시집 ‘봄날에는 만나야지’, 리토피아, 2023)
[시의 눈]
몇 번의 나들이와 몇 번의 찻집에서 차를 마시는 동안 가을은 훌쩍 떠나고 있다. 바람이 점점 차가워진다. 낙엽의 비행이 일으키는 운동에너지가 한금 한금 가을을 밀어내고 있다. 붉고 고운 계절이 사라진다는 것은 짙은 아쉬움이다. 언제부턴가 가을이 짧아지고 있다. 짧아진다는 것은 두려움이자, 안타까움이다. 그렇게 가을은 안쓰러움의 대상이 됐다. 가을 해는 쉬이 진다. 짤막한 해가 기울고 금세 어둠이 내려앉는다. 구르몽의 낙엽들이 영혼의 소리로 울며 몸을 궁그른다. 존재론적 몸짓이 도처에서 파닥인다. 책갈피 또한 이런 분위기를 감안하고 있음이 분명하다. 그도 허전한 내면은 마찬가지다. 반쯤 꽂힌 책갈피, 그 역시 분명 찬 기운의 밀도를 피부로 짚고 있다. 그는 지금 가을 속으로 들어가는 것일까, 가을로부터 빠져나오는 중일까. 반가운 두 발을 계절 속에 들이밀자마자 계절이 막을 거두려 하는 이 헛헛함. 서둘러 파장하는 오일장처럼. 계절의 끄트막을 담담하게 수긍하며 발을 뺄 것인가, 아니면 마지막 아름다운 이별 속으로 더 깊이 발을 들이밀 것인가. 책갈피는 채 갈피를 못 잡는다. 떠남은 기다림을 동반한다. ‘기다린 세월만큼 눌린 자국 깊다’, 가을의 뒷모습이 남긴 음각이다.
<광주매일신문 윤삼현·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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