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쓰기 공부방

두부의 맛 / 이병일

귀촌일기 박뫼사랑 2024. 12. 12. 13:41

두부의 맛 / 이병일

 

갓 만든 두부의 속은 회오리치는 번개의 뿌리가 있어 혀를 델 수도 있으니, 반듯하게 칼금이 그어진 모서리를 희끄무레한 맛의 국경이라고 해두자

 

두부의 바깥은 잠잠하다 두부의 심장엔 무너지는 하얀 달이 있어 조용한 온기가 들끓고 있다고 믿었다 슬몃슬몃 기어나오는 수증기도 빤한 얼굴이라고 믿었다

 

저만치 두부의 맛이 창백하게 반짝일 때, 나는 밥상에 다정히 앉아 잇몸으로 두부 먹는 아이를 생각한다

 

어여쁜 손가락으로 두부를 누르는 아이는 두부 속에 숨은 몇개의 감정을 발견하였다 말랑한 힘이 품고있는 기하학 혹은 컹컹 짖지 않는 둥근 무늬랄까,

 

잇몸 속에서 앞니가 돋아날 때, 아이는 가장 말랑한것이 가장 단단하다고 생각한다 손톱과 발톱이 자라듯이 차가워지는 이 희끄무레한 두부 앞에서 아이는 입을 크게 벌린다

 [이병일 '아흔아홉개의 빛을 가진' 창비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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