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쓰기 공부방

우리가 매일 지나치는 것 / 강우근

귀촌일기 박뫼사랑 2024. 6. 4. 11:35

우리가 매일 지나치는 것 / 강우근

 

오늘 처음 보는 당신

 

횡단보도의 맞은편에서 갈색 코트를 입은 채로 초록불을 기다리고, 카페의 옆 테이블에 앉아 한 사람이 서서히 죽어가는 소설을 읽고, 지하철 같은 칸에서 도시의 불빛이 사라지는 것을 본다.

 

그런 당신은 오늘 우울하거나 기쁜가? 나는 당신을 향해 매일 조금 우울하거나 기쁜 표정을 지을지도 모르지만

 

그건 우리에게 크게 중요하지 않을 것이다.

 

오늘 내가 보도블럭을 걷다가 동전을 흘리지 않았거나, 카페의 구석 자리보단 햇빛이 비치는 창가 자리를 살펴보면, 사람들이 가득한 지하철에 몸을 집어넣지 않았다면

 

당신을 영영 마주하지 않을 수도 있다. 그렇게 당신이 나는 봤을 것이다.

 

담장 위를오르는 고양이의 날렵한 꼬리같이. 지도앱을 띄우고 같은 장소를 헤매는 관광객의 머뭇거림 같이

 

우리가 이렇게 지나친다는 것. 우리가 이렇게 서로에 대해서 알지 못한다는 것. 우리의 가족 중에 누가 아프고, 우리가 몇번의 짧고 긴 이별을 하며 살아왔는지 모른다는 것은

 

복잡한 세상에서 참 다행인 일

 

메일 바뀌는 건물의 전광판같이, 횡단보도의 신호같이 우리에게는

 

우울하거나 기쁜 일이 생겨나고

 

나는 웃는 연습을 할 것이다. 갑자기 웃을 것이다. 나를 모르는 당신을 향해

 

오늘이 처음이자 마지막인지도 모르니까. 이게 우리의 짧은 눈 맞춤일 테니까. 그걸 곧 잊어버릴 테니까.

 

우리는 이렇게 우리와 비슷한 사람을 하루에도 수천번 지나칠 테니까. 만나도 만나지 않아도 되는

 

우리는 매일 어딘가에서

 [강우근 '너와 바꿔 부를 수 있는 것' 창비 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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