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레는 의상 / 안은숙
옷걸이에 걸린
상의(上衣) 하나, 설레고 있다
공중을 아랫도리로 삼고
주머니마다 어지럼증이 가득해
어느 바람에나 잘 흔들린다
단추가 없는 상의는
실이 꿰어진 바람의 눈이고
흔들리는 레이스는
피지 않은 바람의 깃이다
반나절은 하마터면
날려갈 뻔한 외출이었다
=안은숙 시인(1965~)=
빨랫줄 옷걸이에 레이스가 달린 “상의(上衣) 하나” 걸려 있다. 이른 아침에 일어나 밥을 하고, 남편과 아이들을 챙겨 보내고, 설거지와 청소를 하고는 널어놓은 빨래다.
연일 반복되는 일상은 심신을 지치게 한다. 아무리 쓸고 닦아도 티가 나지 않는 집안일을 마치고는 차 한 잔의 여유를 누린다. 살랑살랑 바람에 흔들리는 상의 레이스가 눈에 들어온다. 순간 옷걸이에 걸린 옷처럼 집안일에 묶여 있다는, 내 삶의 위치와 가치를 생각하다가 마음이 심란해진다.
“어느 바람에나 잘 흔들린다” 했지만 어지간한 바람으로는 옷걸이를 벗어날 수 없다. 마른 옷은 다시 옷장에 걸리는 신세가 된다. 레이스가 달린 옷의 한때를 추억하거나 외출하는 상상만으로도 잠시 설렌다.
옷은 이탈, 사람은 일탈인데 둘 다 바람이 매개다. “공중을 아랫도리 삼”았으니, 외출 준비는 끝났다. 하지만 “피지 않은 바람의 깃”이다. 일탈은 상상에 그치고, “하마터면”이라는 말에선 아쉬움과 안도감이 교차한다. 삶의 변화는 상상 그 너머에 있다. <경향신문 김정수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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